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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세설신어 [130] 애여불공(隘與不恭)

바람아님 2014. 10. 12. 21:40

(출처-조선일보 2011.11.03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병자호란 당시 15만의 청나라 군대는 동아시아 최강의 정예였다. 

조선의 오합지졸 1만이 군량미도 없는 상태에서 버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은 또 어찌하는가?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썼다. 

항복은 절대로 안 된다며 왕이 보는 앞에서 김상헌이 이를 찢었다. 

최명길이 찢긴 문서를 이어 붙이며 말했다. 

"찢는 것도 옳고, 줍는 것도 옳다." 최명길은 온갖 욕을 다 먹었고, 김상헌은 일약 영웅이 되었다.

두 사람은 훗날 심양(瀋陽)의 감옥에서 다시 만났다.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두 대 걸친 우호를 다시 찾아서, 백년간의 의심을 문득 풀었네. 

從尋兩世好, 頓釋百年疑"라는 시를 건네며 긴 오해를 풀었다. 방법이 달랐을 뿐 위국애민의 

마음만은 같았음을 인정했다. 

한편 김상헌은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4년간 청나라 감옥에 갇혀서도 끝까지 강직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최명길의 합리적 지성과 툭 터진 금도(襟度)도 위기의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두 사람은 모두 승자였다.

백이(伯夷)는 바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악인과는 아예 상종조차 않았다. 

무왕(武王)이 아버지 문왕(文王)의 상이 끝나기도 전에 포악한 임금 주(紂)를 치는 의로운 군대를 일으키자, 

그 말고삐를 붙잡고 안 된다며 길을 막았다. 끝내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임금도 섬기고, 낮은 관직도 사양하지 않았다. 

오로지 맡은 직분에 힘써 백성을 기르는 데 마음을 쏟았다. 

사람들이 자리에 연연하는 것으로 여겨 다른 곳에 가서 벼슬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민망해하자 그가 말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부끄러움 없기를 구할 뿐이다." 그는 끝내 부모의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맹자는 둘 다 성인(聖人)으로 높이면서도 "백이(伯夷)는 속이 좁고[隘] 유하혜(柳下惠)는 공손하지 못하다[不恭]. 

속이 좁은 것과 공손하지 못한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않는다(伯夷隘, 柳下惠不恭, 隘與不恭, 君子不由也)"고 했다. 

강경한 원칙론은 속이 후련하지만 무책임하다. 

온건한 타협론은 불가피해도 욕먹기 딱 좋다. 백이도 옳고 유하혜도 옳다. 

김상헌도 필요하고 최명길도 있어야 한다. 

싸울 때 싸워도 위국애민의 진심이 들어 있어야 모두 승자가 된다. 

허심탄회(虛心坦懷) 없이는 함께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