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詩와 文學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25>그저 그런

바람아님 2014. 11. 28. 17:13

 

 

그저 그런
―백상웅(1980∼)

가방이 뜯어졌다.
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잊은 영수증, 책, 동전,
너무나도 익숙한 흔들림이나 덜컹거림까지도
쏟아졌다.

게을러서 여태 내가 기대고 살았다.

장대비에 젖고 눈발에 얼고 한 날은 햇볕도 쬐고
하면서, 가방은 울상이었다가 펴지기도 하면서.

연애도 하고 이별도 했다.
이력서도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다.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였다.
짐승이 되려다가 만 가방, 짖다가 그만둔 가방,
소처럼 여우처럼 악어처럼 고래처럼
착하지도 나쁘지도 못하는 가방.

가방이 제 밑바닥으로 입을 벌렸다.
찢어지면서 이빨의 형상까지 만들었다.
이제 이 가방의 시대는 끝났다.

‘가방이 뜯어졌다./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밑바닥이 찢어져 더이상 제구실을 못할 정도로 오래 들고 다닌 가방. 가방이 찢어져 그 안에 든 것이 우르르 쏟아지는, ‘대략난감’한 사태를 모티브로 화자는 가방과 함께한 시간을 돌아본다. 그런데 당최 빛나는 일도, 신나는 일도 떠오르지 않는다. 흔들리고 덜컹거린 일뿐.

가만히 가방을 보면 생활이 보인다. 재질이나 상표나 디자인 같은 겉모습도 그렇지만, 그 안에 든 물건들이 가방 주인의 삶을 보여준다.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항상 끼고 있었던, 가방은 알고 있다. 짐승이 되려다가 만, 짖다가 그만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화자의 삶을. 내가 달리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가방조차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이력서도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지. 나름 열심히, 밑바닥이 입을 벌리도록 살았지! 그동안 애썼다. 고마웠다. 잘 가라, 가방이여, 내 청춘이여!

전망 없는 세대의 비관을 애면글면하지 않고 권태롭게 펼쳐 보여 시니컬한 맛이 난다. 사실 삶이라는 게 행복도 낭만도 없는 거 아니야? 그저 그런 것. 그게 현실이지. 휴학을 밥 먹듯 하고, 하루 세 차례 아르바이트를 뛰며 하루하루 발목 잡혀 사느라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88만 원 세대’의 마음풍경이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