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만파식적] 신라 남녀의 사랑

바람아님 2015. 4. 15. 10:17
서울경제 2015-4-12

신라 21대 소지왕은 죽기 3개월 전인 서기 500년 날이군을 방문했다가 유력자 파로(波路)의 딸 벽화(碧花)라는 여인과 관계한 설화로 유명하다. 벽화는 당시 16세의 소녀였고 소지왕이 60대 후반에서 70대로 추정되니 당시로서도 충격적이어서 이 기록은 삼국사기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지왕은 비단 보자기에 싸여 바쳐진 소녀를 돌려보냈으나 왕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생각나 다시 찾아가 만났으며 나중에는 아들을 하나 낳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설화의 결말이다.

이 설화는 1970년대 중반 경주 황남대총 발굴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무덤에서 나온 60대의 남자와 10대 여자 인골이 설화와 들어맞는데다 신라의 순장풍속이 소지왕 다음 대인 지증왕 3년(502년)에야 비로소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주장은 벽화가 법흥왕의 후비가 됐다는 다른 기록과 맞지 않고 연대 측정 등으로 볼 때 5세기 초반 내물왕과 눌지왕의 무덤으로 봐야 한다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힘을 잃었다. 발굴 인골을 터부시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시 묻었다고 하니 현재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최근 문화재청은 황남대총과 가까운 경주 황남동의 5세기 후반 신라 무덤에서 30대 귀족으로 보이는 여성 유골과 20대 남성으로 보이는 유골이 겹쳐져 출토됐다고 발표했다. 부장품이나 유골이 포개져 있는 형태로 보아 귀족으로 보이는 여성 무덤에 남성이 순장된 행태로 보인다는 평가다. 남성이 순장된 첫 사례여서 호위 무사나 시종 등이 같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나 연인 관계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황남대총에서도 남자에게서는 금동관, 여자에게서는 신분이 높음을 의미하는 금관이 나와 역사학계는 지금껏 논란 중이다. 황남대총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우리가 신라 사회를 너무 오늘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도시 구석구석이 신라 박물관인 경주다. 1,500년 전 신라인의 실제 생활과 그들의 사랑이 실제 어땠는지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온종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