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5-5-20
이 옷은 본래 일본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 여성들이 밭일할 때 입던 작업복이었다. 일제는 이른바 '전시(戰時) 체제'를 선포한 1940년대에 몸뻬를 국민복처럼 입도록 강요했다. 속옷 비슷해 여성들이 잘 입지 않자 1944년엔 이 옷 안 입은 여성의 버스·전차 승차나 관공서 출입까지 제한했다(조선일보 1972년 4월 5일자).
광복 직후 한동안 싹 자취를 감췄던 몸빼는 1950년대 거리에 다시 나타났다. 궁핍했던 시절, 이 옷 저 옷 가려 입을 처지가 아니었다. 많은 남자가 물들인 군복을 입었듯, 여자들 표준 패션은 몸뻬에 검정 고무신이었다. 심지어 관청에서도 착용을 강력히 권했다. 1950년 서울 종로경찰서는 '사치를 한 자는 출입 금지'라며 '여자는 몸뻬 착용을 특히 요망'한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50년 11월 14일자).
일제가 우리 궁궐을 능멸하려고 지은 창경원 동물원을 광복 후에도 수십년간 유지해 왔듯, 총독부의 몸뻬 권장책을 대한민국 경찰이 흉내 낸 듯했다. 시민들 반발이 컸는지 1951년 내무부 장관은 경찰의 몸뻬 강요를 몰상식한 경찰관들의 부녀자 인권 유린이라고 비판하며, "(일본 옷을) 민족적으로도 장려할 이유는 없다"고 못박았다. 그래도 이 옷은 사라지지 않고 서민들의 '가장 편한 옷'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1999년 재벌 회장 부인이 범죄 혐의를 받던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관 부인의 옷값을 내 줬다는 소문에서 출발한 '옷 로비 의혹 사건' 때, 한 시민단체 대표는 몸뻬 18벌을 총리실로 보내기도 했다. "외제옷 구입에 정신 팔린 장관 부인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었다(조선일보 1999년 6월 1일자).
이런 역사와 사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년 전부터 몸뻬 패션이 젊은 여성들 사이에 선풍을 일으켰다. 할머니나 아줌마 옷인 줄만 알았던 헐렁한 꽃무늬 바지는 복고풍 패션으로 부활했다. 넓적다리가 넓고 헐렁한 '배기 팬츠' 유행과도 통했다.
어느 전문가는 "엄마들이 몸뻬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세대들이 이 옷의 원래 용도를 모르고 편하고 이색적인 옷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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