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감은사 3층 석탑에서 출발해 골굴사와 기림사 지나 보문단지로 들지 않고 왼편으로 꺾어지니 토함산 오르는 길이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내려와 시내로 들어와 분황사, 팔우정, 계림, 첨성대, 대릉원을 짚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을 때까지 가로수 벚꽃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벚나무 아래 혼곤히 낮잠 한방 때리는 건 고작 한나절의 일감도 안되리라. 살아서 세상과 잠시 작별하는 것이니 한 시간 어름이면 족하리라.
그 벚나무 가지가지마다 꽃잎 몇 장 달고 있나. 무성한 꽃잎들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헤아려보는 건 하루의 일거리는 되고도 남으리라. 무수한 꽃잎 벌어져 벚나무를 낳고 경주 거리마다 즐비하니 그 나무들 하나하나 눈 맞추며 살펴본다면 남은 생애 지루할 겨를이 없을 듯도 해라. 허나 나무보다 마른 성격의 나는 그처럼은 살 자신이 없어 고작 사흘 만에 서라벌을 떠난다. 서라벌, 그 이름을 빌려간 서울로 무턱대고 등신같이 간다. 달구벌 지나 추풍령 넘고 한밭 지난다. 한강 건너 남산 지나 인왕산 아래로 부릉부릉 목석같이 눈감고 간다.”(졸저, 신인왕제색도에서 인용함)
잎이 가지에 달렸다지만 나무에게만 속하는 일일까. 꽃이 생식기관이라지만 어디 그뿐만의 것일까. 창(窓)처럼 나무에 달려 크기를 조절하면서 피는 꽃들. 나무에서 떨어져 문(門)처럼 자유자재로 위치를 정하면서 지는 꽃들. 막 떨어져 내린 한 꽃잎을 쫓아가서 쪼그리고 앉아보면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도, 먼저 가신 이들의 근황도 어른거리는 듯! 벚나무, 장미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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