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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족이 멸족까지 당하면서 황실공차를 멈춘 이유

바람아님 2016. 4. 23. 00:24
조선일보 : 2016.04.22 07:42

[이코노미조선:황실공차를 거부한 민족 멸족시킨 명나라 신종(神宗)]
 

명태조(明太祖) 홍무제(洪武帝) 때부터 황실공차(皇室貢茶)로 진상하기 시작한 녹명차(鹿鳴茶)는 중국 소수민족 북(僰)족이 사천성 공현(四川省 珙縣)의 고산지대에서 만드는 명품 녹차다. 황실공차로 지정되는 영예(榮譽)는 명예 이전에 멍에가 되기도 했다. 나라에서 차밭을 엄격히 관리 감독해 최상급의 차를 황실에 바치고 나면 그때부터 그 지역의 차는 지방 토후세력이 자행하는 가렴주구의 대상이 돼 상납에 시달렸다. 농민들은 황실공차로 생기는 득보다 부담이 훨씬 컸다. 일부 농민들은 차밭을 불태워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녹명차잎을 따고 있는 북족. /이코노미조선

明 신종은 사보타주 주인공,
나라 정사 도외시 했지만
임진왜란 조선파병은 강행


정사 도외시한 ‘사보타주’ 주인공

명나라 전성기에 황제가 된 제13대 신종(神宗, 1563~1620)은 1572년 7월 융경제(隆慶帝)의 뒤를 이어 10살에 즉위해 1620년까지 48년 동안 황위(皇位)에 있었다. 신종이 사용한 연호를 따라 만력제(萬曆帝)로도 불리며 본명은 주익균(朱翊鈞)이다. 선제(先帝)의 유지에 따라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이 나이 어린 신종을 대신해 10년 동안 정무(政務)를 맡아 정치적 안정과 문화발전을 이뤘다.


장거정이 죽고 신종이 친정(親政)을 하자 환관(宦官)이 득세해 내각과 갈등이 심화됐다. 신종은 환관을 지방에 파견해 세금을 직접 거둬 국가재정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할 지하궁전 건축과 매일 벌어지는 연회 비용으로 탕진했다. 나라의 정사를 도외시했던 신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 군대를 출병시켰다. 신종은 ‘조선의 황제’라는 비난어린 평가와 조롱을 받았다. 후대 중국의 사학자들도 자국 영토가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닌 전쟁에 대군을 출병시켜 나라의 재정을 어렵게 만든 신종을 폄하해 명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군주로 기록했다.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준 명나라 신종을 모신 충북 괴산 만동묘. 계단이 너무 가파르고 좁아 자연히 몸을 옆으로 돌려 조심스럽게 오르내리게 만든다. /조선일보 DB

재상 장거정의 내각에
환관세력을 키워 대립


후금(後金)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요동(遼東)을 공격해오는 위기상황에서 누르하치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병부상서(兵部尙書)가 군비를 요청해도 군비부담을 거절한 신종이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사비까지 털어 조선에 두 번이나 대규모 지원군을 파병했던 역사적 사실을 중국 역사가들은 지금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신종은 황태자 책봉 제로 내각과 대립하며 환관세력을 키웠다. 엄격한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장거정이 추진했던 내정개혁을 후퇴시킨 것도 모자라 장거정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의 모욕을 준 신종은 1589년부터 죽을때까지 조정(朝廷)을 무시하고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이정기라는 재상이 사직을 청했지만 신종은 반응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종의 재가 없이 고향에 내려온 이정기는 가족을 피신시키고 절에서 기거하며 5년 동안 152번이나 사직서를 올렸지만 신종은 답이 없었다. 사약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제풀에 지친 이정기는 결국 일찍 죽고 만다. 그제서야 신종은 죽은 이정기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고 두둑한 퇴직금도 하사했다 한다. 명나라 최장기 재위기간을 지낸 신종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황제의 사보타주’ 주인공이었다.

북족을 멸족시킨 명나라 신종. /이코노미조선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북족 멸족 사건


중국 역사를 넘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 신종 때 벌어진 북족 멸족사건이다. 중국 서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소수민족이었던 북족은 절벽에 조상의 관을 매다는 현관(懸棺)풍속을 중국 최초로 시작한 민족이다. 북후국(僰侯國)이란 나라를 세워 진(秦)나라와 대치하기도 했던 북족은 독립의지가 강해 수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시행하는 명나라 황실에 녹명차를 공물로 진상하며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던 북족은 나날이 심해지는 지방 봉건군주의 폭정에 저항해 농민의용군을 결성했다.


10살의 어린 나이로 신종이 황제로 즉위할 무렵 북족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황실공차로 바치던 녹명차를 황실에 보내는 것을 막았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북족을 진압하기 위해 14만 대군이 투입됐다. 산악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초기진압에 실패한 명나라 진압군은 저항군과 민간인 구별 없이 북족을 학살했다. 1572년 7월부터 명나라 진압군은 초토화 작전에 나서 야습을 감행해 60여개의 촌락을 불태우며 인종청소를 벌였다.


살던 마을을 떠나 산 위로 쫓기던 북족은 조상의 관을 모신 높은 절벽 위에서 치른 전투를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북족의 농민저항은 멸족으로 끝났다. 녹명차도 북족과 함께 사라졌다. 북족의 전설에 의하면 옥황상제를 위해 불로장생차를 만들던 ‘녹명’이라는 신선이 딸과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와 차나무를 심어 북족에게 재배기술을 가르쳤다. 녹명의 딸은 북족 청년과 결혼해 차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다. 북족은 고마운 신선의 이름을 차에 붙여 ‘녹명차’라고 지었다 한다.

녹명차. /이코노미조선

50년대 '북족의 후예' 나타나
중국 정부 인정해


멸족된 북족 재등장

북족을 멸족시킨 신종은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자신을 위해 만든 지하 능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연회로 소일하다가 죽었다. 신종이 묻힌 정릉(定陵)은 1956년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이 주도해 연구 목적으로 발굴되지만 홍위병에 의해 농민의용군을 학살한 봉건군주라는 죄명으로 신종의 유골은 부관참시를 당한후 불태워졌다. 1956년 중국에서 실시한 민족 분류작업과정에서 북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좀 더 철저한 고증을 거쳐야겠지만 중국 정부는 이들을 일단 북족으로 인정했다. 차로 말미암아 멸족된 북족의 재등장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매력적인 존재였다. 북족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절벽 아래에 조성된 북족문화 유적지에서 민속공연을 하는 북족을 볼 수 있었다. 북족과 함께 사라진 녹명차도 다시 세상에 나왔다. 


<본 기사는 이코노미조선 144호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