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05-05 03:00:00
“여보시오. 어디서 왔냐고 묻지 말고, 어디로 갈 것인지 물어보시오. 나 ○○프로에서 출연해 달라고 해서 왔소.”
마침 그 프로그램 진행자인 제자가 멀리서 보고 달려가 모셨다. 그 제자는 “역시 우리 교수님 말씀은 다 철학이에요. 우리의 인생에서도 어디서 왔냐보다 어디로 갈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게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다.
지난달 경기 파주시에 있는 ‘반구정’에 가게 되었다. 황희 정승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가시기 전까지 3년 동안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셨다는 유적지다. 그곳 기념관에는 황 정승의 유명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김종서 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 장군은 일찍부터 용맹을 떨친 호랑이 같은 장수여서 아무래도 좀 겸손함이 부족했는지 중신회의에서 삐딱하게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눈에 거슬리지만 누구 하나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데 황 정승이 아랫사람을 불러서 일렀다. “장군께서 앉아 계신 모습이 삐딱한 걸 보니 의자가 삐뚤어진 모양이다. 빨리 가서 반듯하게 고쳐 오너라.”
장군이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음은 물론이다. 그런 식으로 가끔 장군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자 한 중신이 유독 장군에게 더 엄격한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장군은 앞으로 나라의 큰일을 맡아서 하실 분이기 때문이오. 혹시라도 장군의 훌륭한 능력을 작은 결점 때문에 그르칠까 염려되어서 그러오.”
황 정승은 이미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은 늙어 물러갈 것이고 다음 세대가 뒤를 이어갈 것이기에 미래를 내다본 것. 마치 지금의 자리가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로 갈 것인가는 모르고 어디서 온 것만 내세우면 미래가 없다.
우리도 때때로 자문해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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