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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의 차이

바람아님 2016. 5. 22. 23:38
[중앙일보] 입력 2016.05.21 00:01

트라우마는 영원한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아픔이다
무의식 속 공포를 일부러 의식해야 두려움이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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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작가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내가 가장 큰 효험을 본 마음 챙김 연습은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구분하는 것’이다. 예컨대 원고마감이 막 닥쳤을 때라든지, 강의가 여러 개 몰려 있는 날에 느끼는 압박감은 ‘스트레스’다. 시험에 대한 공포나 교통체증에 대한 짜증도 그렇다. 시험이 끝나고 교통체증이 끝나면 스트레스는 사라진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그 ‘상황’이 끝나도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픔이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교통체증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출발한다든지, 시험준비를 미리 열심히 해놓는 것으로 스트레스는 대폭 줄어든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노력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총격이나 테러 같은 심각한 사건이 바로 트라우마가 된다.

트라우마는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구별 짓는 치명적인 상처다. 주변인의 도움도 필요하고, 자신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커다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스트레스가 국소부위통증이라면 트라우마는 뇌혈관질환인 셈이다. 스트레스는 일시적 기분이지만, 트라우마는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관건은 자신의 상처가 스트레스인지 트라우마인지 차분히 성찰해 보는 것이다. 상처를 과대평가하면 스트레스를 트라우마로 착각해 엄살을 부리게 되고, 상처를 과소평가하면 트라우마를 스트레스로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나중에 큰코다치게 되는 셈이다.

습관적으로 ‘나 우울증인가 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우울한 기분’과 ‘우울증’을 혼동할 때가 많다. 우울증엔 전문적 치료가 필요하지만, 우울한 기분은 산책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것처럼 평범한 기분전환만으로 충분히 떨쳐낼 수 있다. 미디어를 통해 들리는 정신질환의 가짓수가 급격히 늘어난 현대사회에서는 일시적 기분과 심각한 증상을 혼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를 ‘번아웃증후군’이라고 착각하고, 기분변화가 심한 상태를 ‘조울증’이라 착각할 위험이 늘어난다. 몸에만 건강염려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심각한 건강염려증이 횡행한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별것 아닌 스트레스로 착각하고 가볍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나는 항상 괜찮다.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자기암시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사실 나도 이런 쪽이다. 나는 원고 쓸 때보다도 강의를 할 때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데, 사람들이 잠깐 졸거나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며칠 동안 벙어리냉가슴을 앓을 정도였다. 글에 대해 비판받을 땐 금방 회복되지만 강의에 대해 비판받으면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 상처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돌이켜보니 초등학교 시절 무슨 발표를 하다가 크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던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이 생생히 살아남아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때 그 상처는 무려 30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내 ‘말하기 습관’의 어디엔가 떼어낼 수 없는 거대한 혹처럼 매달려 있었다.

나는 ‘남들 앞에서 말하기’에 엄청난 공포를 느꼈던 내 안의 내면아이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너무 하찮은 일이야. 남에게 이야기할 가치도 없어’라고 생각했던 의식의 통제가 문제였던 것이다. 심리학자 융은 말한다. 무의식은 괴물이 아니라고. 의식이 무의식의 문제를 깨닫기 시작하는 순간 무의식은 더 이상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조스(Jaws)’ 같은 괴물이기를 멈춘다. 우리가 억누를수록 무의식의 위험은 더 커진다. 무의식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내 공포가 의식화되자 비로소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이제 나는 속 시원히 고백해 버린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어서요.” 그럼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완화된다. 상처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상처와 더불어 공생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내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 상처와의 평화로운 동고동락은 시작된다.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