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차-조선일보 2016.07.04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김밥·아이폰처럼 하나의 상품이 각국 재료·부품 합해져 생산되는
'글로벌 가치 사슬(value chain)' 한계 맞아… 향후 무역 증가율 반토막 날 듯
가치사슬로 물동량 증가 덕 봤던 한국 조선업도 냉정한 점검 필요
김밥은 막강한 미국 햄버거 체인의 한국 시장 침투를 막아낸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김밥에는 미국산 쌀과 고기, 중국산 채소, 동남아산 맛살이 들어가 있기 십상이다.
애플의 아이폰은 한국, 일본, 대만, 미국, 유럽이 제조한 부품을 중국이 조립·생산하고 전 세계로 수출한다.
이렇게 하나의 상품이 전 세계에서 쪼개져 생산되는 현상을 '글로벌 가치 사슬'이라고 부른다.
공업화 이후 우리의 국가적 목표가 됐던 '국산화율 제고'는 21세기 경제에서 촌스러운 개념이 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세계 생산 네트워크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주도적인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다.
글로벌 가치 사슬의 심화는 전통적 통계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글로벌 가치 사슬이 심화되면 수출 상품에 점점 더 많은 수입 중간재가 포함된다.
따라서 동일 금액의 수출이 창출하는 국민소득과 고용은 점점 감소한다.
또한 중간재의 국경 간 이동이 더욱 빈번해지면서 수출과 수입이 소득에 비해 빠르게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1995~2011년 사이 한국에서 수출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6%에서 56%로 급등했다.
그러나 수출이 유발한 중간재 수입을 빼고 나면 동일 기간 수출 비중은 20%에서 32%로 증가했을 뿐이다.
수출의 국민소득 창출 능력이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수출 의존도가 너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글로벌 가치 사슬 심화의 의미를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가치 사슬이 심화되면 수출된 상품은 수입국에서 가공·조립돼 또 다른 국가로 수출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한국이 중국에 수출한 반도체가 아이폰에 탑재돼 다시 미국으로 수출되는 것이 좋은 예다.
이는 국가 간 무역통계 해석에 혼란을 초래한다.
2011년 한국의 총수출에서 대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1%, 대미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1%여서 중국 수요가
미국 수요에 비해 3배나 중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 수출품의 최종 수요자를 추적해보면 총수출 중 중국에서 최종 소비되는 것의 비중은 19%,
미국 비중은 17%로 둘이 엇비슷하다.
일반 수출 통계가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글로벌 가치 사슬 심화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우리의 수출 대기업은 새로운 생산 질서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기존 기술을 중국과 동남아의 값싼 노동과 결합함으로써
보유 기술의 수명을 연장했다. 그리고 여기서 생긴 여력으로 동일 산업 안에서 기술을 업그레이드했다.
기술이 범선의 돛이라면 값싼 노동력은 거기에 불어오는 순풍이었다.
하지만 이 순풍은 동시에 수출 대기업이 새롭고 위험한 신산업에 진출할 동기를 크게 약화시켰다.
글로벌 가치 사슬의 심화는 1980년대 후반에 시작돼 지속적으로 진행되다가 세계 금융 위기 직전인 2007년 절정에 도달했다.
이 기간 세계 무역은 세계 GDP보다 2배나 빠르게 증가했다.
그러나 2012년부터 세계 무역과 세계 GDP가 거의 같은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많은 학자는 글로벌 가치 사슬의 심화가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는 조선업의 불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80년대 말 위기에 빠졌던 한국 조선 산업이 위기에서 벗어나 긴 호황을 맞았던 것은 글로벌 가치 사슬에 의한
물동량 증가 덕이 컸다.
대규모 구제 금융으로 연명하던 대우조선도 이 호황 덕을 봤다.
정부는 이 시나리오가 반복될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는 앞으로 세계 무역 증가율이 2000년대 중반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조선업이 회생할 토대가 허물어졌다는 뜻이다.
반복되지 않는 행운에 의존하는 산업정책은 위험하다. 냉정한 눈으로 세계 구조 변화를 지켜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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