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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균열보다 더 큰 공포는 세계 부채 과잉

바람아님 2016. 7. 4. 00:24
조선일보 : 2016.07.02 06:18

[아데어 터너 前 영국 금융감독청장이 보는 브렉시트·글로벌 경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중간 크기의 위험에 불과합니다. 브렉시트 때문에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고 증시가 추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단기에 그칠 겁니다. 중장기적으로는 영국과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이 낮아질 테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를 불러올 만한 사건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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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어 터너 前 영국 금융감독청장. /블룸버그

'브렉시트 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영국은 유럽에서 금리정책을 정상화할 여력을 가장 먼저 회복한 나라로 꼽혔다. 일부 유럽연합(EU) 회원국은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는 가운데 영국은 최근 3년 동안 평균 2%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하지만 지난 23일(현지 시각)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 진영이 51.9% 대 48.1%로 승리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에 공포를 몰고 온 진앙이 됐다.


영국에서 손꼽히는 국제경제·금융 전문가인 아데어 터너(Turner·61·사진) 신경제사고연구소(INET) 운영위원장을 런던 사무소에서 만났다. 곱슬거리는 백발의 터너 위원장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노트북으로 일하던 중이었다.

터너 위원장은 민관(民官)을 두루 거친 실무형 경제 전문가다. 컨설팅회사 매킨지에서 근무했고, 영국의 재계 단체인 영국산업연맹(CBI) 대표와 투자은행 메릴린치 유럽법인 부회장 등을 지냈다. 이후 영국 정부 산하 자문기관인 임금위원회와 연금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거쳤고, 미국발(發) 금융 위기 충격이 닥친 2008년 9월 영국 금융감독청(FSA) 수장을 맡았다. 


그는 2013년 퇴임할 때까지 영국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금융감독 체계를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미국 뉴욕에 기반을 둔 INET은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과 대안을 연구하는 경제 싱크탱크다. '채권왕' 조지 소로스가 설립했다. 터너 위원장은 금융감독청장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INET에 영입됐다. 그는 금융위기에 대한 연구 결과를 지난해 '부채와 악마 사이: 돈, 신용, 그리고 세계 금융 바로잡기(원제 Between debt and the devil: money, credit, and fixing global finance·국내 미출간)'라는 책으로 펴냈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對 영국 투자 감소 크지 않을 것

―사전 여론조사에서는 52% 대 48%로 브리메인(Bremain·영국의 유럽연합 잔류)이 우세할 것이란 전망이 대부분이었는데, 실제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여론조사가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브렉시트에 대한 찬반 득표율 자체는 50대50에서 몇 %포인트 차이 날 뿐이니까요. 하지만 예상보다 더 많은 유권자, 전체 투표자의 52%가 왜 브렉시트에 표를 던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자본과 노동력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계화로 소득과 교육수준이 낮은 영국인들이 받은 불이익이 상당하고, 이들은 EU를 통해 누리는 혜택보다 손해가 더 크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과 기업인들은 이런 상황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브렉시트에 대한 열기가 미국 공화당의 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열풍과 유사하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저 역시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브렉시트 득표율이 더 높았던 이번 투표 결과를 봤을 때, 그가 미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어 개인적으로는 우려스럽습니다."


―이번 국민투표 결과가 영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앞으로 3~5년 동안 영국 경제는 투자 감소로 인한 충격을 받을 겁니다. EU 탈퇴 절차와 관련된 불확실한 상황 때문에 기업들이 영국에 대한 투자 결정을 늦추고, 외국인 직접투자도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EU 잔류 진영에서 주장한 것만큼 큰 규모로 투자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정치·경제 분야의 영국 명문인 런던정경대는 최악의 경우 영국이 입는 직간접적인 경제 손실이 국내총생산의 3.1%인 500억파운드, 한화 약 85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아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장이 지난해 3월 FFSF(Frankfurt Finance Summit in Frankfurt)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블룸버그

'빚의 함정'에 빠진 세계

―영국과 EU가 경제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할 방법은 무엇입니까.

"양측 모두 브렉시트가 이뤄지면 무역 협상을 새로 체결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고 있습니다. 영국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모델은 노르웨이나 스위스입니다. 어느 형태든 무역 협정이 체결되면 장기적으로 영국이 입는 경제적인 타격은 완화될 겁니다. 하지만 EU와 재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브렉시트 진영이 주장했던 만큼 재정 분담금을 줄이거나 이민을 제한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영국 정부가 상당히 양보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협정을 다시 맺은 다음에는 다시 영국 정치권에 후폭풍이 닥칠 겁니다."


아데어 터너 前 영국 금융감독청장. /블룸버그

―브렉시트가 세계경제에도 큰 악재입니까.

"세계경제의 성장률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겁니다. 이미 세계경제는 저성장 국면입니다. 중국의 성장 둔화, 유럽의 경기 침체, 원자재 가격 폭락으로 인한 신흥국 경기 둔화, 서방과 러시아 간 관계 경색과 이슬람국가(IS) 같은 테러 단체의 횡행 등 불안 요인들 때문에 세계경제의 기초체력 자체가 약해진 상황이어서, 브렉시트 같은 중(中)위험에도 성장 동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영국을 선두로 EU 탈퇴 도미노가 이어질 가능성도 남습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현재 세계경제의 최대 불안 요인은 무엇입니까.

"전 세계적으로 부채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상황입니다. 금리 수준이 낮으니 빚을 내기 쉬운 '빚의 함정' 내지는 '부채 과잉'에 빠진 겁니다.

가장 심각한 건 신흥국의 기업부채 문제입니다. 지난 8년 동안 중국·브라질·러시아·터키·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는 미 달러화로 표시된 회사채 발행량이 급증했습니다. 달러화 가치가 상승하거나 미국의 기준금리가 인상되거나 두 가지 요인이 결합됐을 때, 달러 표시 채무가 많은 신흥국 기업들 상당수가 상환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정부의 신용공급 확대 정책이 문제였다고 봅니다. 미국 등 선진국의 경기 침체로 수출이 둔화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업대출을 늘려 투자와 건축 붐을 일으켰지만, 기업부채가 지나치게 급증했어요.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은 250%에 달합니다. 중국 정부가 앞으로 5년 정도 더 신용확대를 용인하는 정책을 유지하는 가운데 자본시장 자유화가 진행된다면, 2022년쯤엔 중국발(發) 금융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김의균 기자

터너 INET 운영위원장은 부채 과잉이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고, 부채 의존도를 낮춘 성장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빚이 늘어나는 원인이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있으며, 이는 언제든지 금융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현대 경제는 신용 확대를 기반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난 20년 동안 선진국 경제는 실질성장률 2~2.5%에 물가상승률 2~2.5%를 더해, 연평균 5% 안팎(명목성장률 기준) 성장했습니다. 이 기간 민간 부채는 해마다 10~20%씩 늘었습니다. 이런 불균형이 누적되면 결국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고, 경기 침체가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해법은 무엇입니까.

"빚을 늘리는 근본적인 원인인 경제 불평등의 심화, 부동산 시장의 과열, 국제 경상수지 불균형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저축과 투자 사이의 합리적인 균형을 깨뜨리고 대출을 촉진합니다. 2008년 이전 미국에선 부가 상위 1%에 심각하게 집중됐고, 전체 인구의 10% 정도인 고소득층만 계속 재산을 불렸습니다. 반면 미국 저소득층의 소득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늘지 않았어요. 정상적인 투자처가 부족할 정도로 쌓인 부유층의 잉여저축을 소득 하위 25% 계층이 (이자를 내고) 빌려갑니다. 이 과정에서 서브프라임모기지(신용등급이 낮은 부동산담보대출) 투자 열풍이 불었습니다. 불평등 문제를 완화하려면 사회적 안전망을 확대하고 최저임금 인상이나 기본소득 보장제도처럼 더 적극적인 정책들을 다양하게 결합해, 저소득층의 생활 수준을 일정 이상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직업 교육 같은 소극적인 정책은 충분치 않습니다.


아데어 터너 前 영국 금융감독청장. /블룸버그

대다수 경제권에서 부채는 부동산 투자 때문에 증가합니다. 더 많은 경제주체가 빚을 내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부채 규모가 급증하고, 1980년대 일본의 부동산 시장 거품 붕괴 같은 사태가 벌어집니다. 부동산 과열을 막기 위해서는 기업 단지가 들어서기 적합한 공간과 문화 시설을 도심 곳곳에 분산하는 도시계획을 시행해야 합니다. 금융감독 당국이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나 소득대비대출비율(LTI) 기준을 엄격하게 유지하고, 부동산 담보대출이 손쉬운 금융기관의 대출 제도를 개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경상수지 불균형 문제를 봅시다. 독일은 GDP의 8~9%에 달하는 흑자를 내고, 한국도 비슷한 수준으로 흑자를 냅니다. 일본은 GDP의 4%, 중국은 4~5% 정도이고 네덜란드는 GDP의 10%에 달하는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웨덴과 스위스도 흑자 국가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나라들은 적자를 본다는 뜻이고, 이런 불균형은 흑자 국가의 잉여 자금이 적자 국가의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해외 부채가 늘어납니다.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보는 중국 등 신흥국은 연금제도 확충과 의료보험 확대 등 정책을 시행해, 더 많은 인구가 소비할 여력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한국에서는 산업 구조 조정도 화두입니다.

"한국의 경제 구조를 보면 전기·전자 등 첨단산업과 철강·조선 같은 중공업이 큰 축을 구성합니다. 중공업은 설비 과잉 문제가 있을뿐더러 기술만으로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한국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중공업이 고용 창출 등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질 것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중공업 산업 구조를 자본집약적으로 바꿔 가격 경쟁력을 키우는 겁니다. 한국은 소득 중상위권에 속하는 나라인 만큼 자본을 투입해 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생산 공정을 자동화할 여력이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