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일사일언] 적반하장의 기술

바람아님 2016. 8. 9. 06:23

(출처-조선일보 2016.08.09 길해연·배우)


길해연·배우 사진드드드드~ 전화기가 몸을 비틀며 전화 좀 받으라고 성화를 부린다. 모르는 번호다. 
새로 바꾼 전화기는 진동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어떨 때 보면 부르르 몸을 떨다가 벌떡 일어나 
재주넘기라도 할 것 같다. 
"잘 지내시죠,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허허허, 지금 어디세요?"

그는 후배 Y의 남자친구 X였고 예전에 몇 번 자리도 함께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정작 그 후배와도 2년 전엔가 보고 명절 때 문자 주고받는 정도로 지내고 있는 터라 
'어디세요?'라는 질문이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일산요, 촬영하느라…."

"강남 찜질방 아니고요?" X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대충 뜬금없는 전화의 이유가 파악되었다. 
후배는 무슨 연유에선가 남자친구에게 거짓말하면서 내 이름을 팔았고, 의심이 간 남자친구는 내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본 것이리라. X는 이런 일이 몇 번짼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뒤의 상황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X는 시치미를 떼고 Y에게 확인을 해 볼 것이고 Y는 또 거짓말을 할 것이고….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이 막장 커플 드라마에 왜 내가 졸지에 출연하게 된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Y는 예전에도 이런 식의 거짓말로 주변 사람들을 공범으로 만들곤 했다. 

"전화를 해서 혼을 내 줘? 아니면 그렇게 살지 말라 붙들고 충고를 해봐야 하나?" 

문자가 연거푸 띵똥띵똥 들어왔다. '언니 미안, X 정말 미쳤나 봐. 내 전화기에서 언니 전화번호 몰래 따놨었나 봐. 

기가 막혀서 정말.' '내가 막 화냈더니 잘못했대. 

언니는 딴 땐 전화 안 받더니 어떻게 그 전화는 받았대. 

안 받을 줄 알고 언니 이름 판 건데. 잘 지내고 언니, 파이팅!'

화가 나기보다는 맥이 빠졌다.

Y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땐 늘 다른 문제를 끌고 들어와 왜 그 이야기를 시작했는지를 헷갈리게 하고 눈물이라도 팔아 

상대방을 무기력하게 만든 다음 교묘하게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로 분위기를 몰아가곤 했었다. 

이번에도 Y는 어리숙한 X로부터 되레 사과까지 받아낸 것이다. 

'여전하구나. 그리고 여전히 그 방법이 먹히고 있구나.'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