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6.08.09 03:15
서울 정동 미국 대사관저 담을 따라 옛 경기여고 쪽으로 오다 보면 언덕에 굳게 닫힌 철문이 나타난다. 오는 9월 이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공사가 벌어질 모양이다. 철문 안쪽에는 길이 하나 있다. 문화재청이 이 길을 120년 전 모습으로 복원한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고종(高宗)의 길'이다. 정동 언덕에 있는 옛 러시아공사관까지 113m 길을 25억원 들여 내년 말까지 손본다고 한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조선의 국왕 고종은 왕궁인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감시의 눈을 피하려고 궁녀로 변장하고 궁녀의 가마에 몸을 숨긴 기이한 행차였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문화재청은 이때 고종이 지나간 길 한 자락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복원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고 명분이 합당해야 한다. 문화재청은 구한말 미국 공사관이 제작한 정동 지도를 근거로 들었다. 지도에 이 길이 'King's road(왕의 길)'로 표기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King's road'에서 아관파천을 떠올리는 건 추정의 하나일 뿐이다. 고종이 경복궁을 빠져나올 때 동문(건춘문)을 이용했는지 서문(영추문)을 이용했는지조차 설이 엇갈리는 실정이다. 120년 전 길 모습을 재현할 만한 사진이나 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복원에 나섰다가 엉뚱한 인공 구조물을 만들 위험도 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조선의 국왕 고종은 왕궁인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감시의 눈을 피하려고 궁녀로 변장하고 궁녀의 가마에 몸을 숨긴 기이한 행차였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문화재청은 이때 고종이 지나간 길 한 자락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복원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고 명분이 합당해야 한다. 문화재청은 구한말 미국 공사관이 제작한 정동 지도를 근거로 들었다. 지도에 이 길이 'King's road(왕의 길)'로 표기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King's road'에서 아관파천을 떠올리는 건 추정의 하나일 뿐이다. 고종이 경복궁을 빠져나올 때 동문(건춘문)을 이용했는지 서문(영추문)을 이용했는지조차 설이 엇갈리는 실정이다. 120년 전 길 모습을 재현할 만한 사진이나 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복원에 나섰다가 엉뚱한 인공 구조물을 만들 위험도 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고종의 길' 복원을 추진하는 사관(史觀) 문제다. 문화재청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라고 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자생적인 근대국가를 추구했던 고종의 삶을 살펴보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대한 국사학계 일각의 설명은 한발 더 나아간다. "아관파천은 대한제국 탄생으로 이어졌다. 당시 열강 사이에서 자주독립국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외교적 노력은 적극 평가해야 한다."
그런가? 아관파천 후 1년 동안 이 나라 국사(國事)는 러시아 국기가 펄럭이는 러시아 공사관 안에서 이루어졌다. 대신들은 러시아 공사가 발급한 통행증이 있어야 국왕이 있는 곳을 출입할 수 있었다. 삼림·금광·어업 등 각종 이권이 속속 러시아로 넘어갔다. '고종의 길'은 경복궁에서 비참하게 왕비를 잃은 고종이 외세에 의탁해 살아남기 위해 찾아 나선 길이었다. 국익보다 개인과 당파의 이익을 앞세운 정치 세력이 겁 많고 몽매한 군주를 등에 업고 다른 정치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 간 길이기도 했다.
역사는 자부심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때론 가시나무 위에 눕거나 쓰디쓴 쓸개를 맛보는 것 같은 반성과 각오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관파천 같은 치욕의 역사 흔적을 되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외세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 때 우리 내부 분열과 권력 다툼이 얼마나 나라를 비참한 지경에 빠뜨릴 수 있는가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복원은 필요하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자주적 근대국가 추구가 얼마나 허망했나 돌아볼 수 있다면…. 나라가 안팎의 도전을 받을 때 최고 지도자의 의지와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일깨울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면 25억원의 '고종의 길' 복원 예산도 크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가? 아관파천 후 1년 동안 이 나라 국사(國事)는 러시아 국기가 펄럭이는 러시아 공사관 안에서 이루어졌다. 대신들은 러시아 공사가 발급한 통행증이 있어야 국왕이 있는 곳을 출입할 수 있었다. 삼림·금광·어업 등 각종 이권이 속속 러시아로 넘어갔다. '고종의 길'은 경복궁에서 비참하게 왕비를 잃은 고종이 외세에 의탁해 살아남기 위해 찾아 나선 길이었다. 국익보다 개인과 당파의 이익을 앞세운 정치 세력이 겁 많고 몽매한 군주를 등에 업고 다른 정치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 간 길이기도 했다.
역사는 자부심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때론 가시나무 위에 눕거나 쓰디쓴 쓸개를 맛보는 것 같은 반성과 각오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관파천 같은 치욕의 역사 흔적을 되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외세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 때 우리 내부 분열과 권력 다툼이 얼마나 나라를 비참한 지경에 빠뜨릴 수 있는가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복원은 필요하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자주적 근대국가 추구가 얼마나 허망했나 돌아볼 수 있다면…. 나라가 안팎의 도전을 받을 때 최고 지도자의 의지와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일깨울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면 25억원의 '고종의 길' 복원 예산도 크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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