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에 필적한 상궁 김개시
물론 이 ‘비선 실세’라는 말은 조선 시대에는 없던 표현이다. 다만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대로 공식적인 경로에 있지 않으면서(‘비선’) 자신의 위치와 자격을 넘어서는 권력을 행사한 사람(‘실세’)들은 꾸준히 있어왔다. 이들은 배후에서 국정을 농단하고 공적 시스템을 무력화했다. 권세와 이익을 탐해 부정을 저질렀다. 이들에 의해 국가 조직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인사는 공정함을 잃었다. 더욱이 이 과정이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들은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권세가들보다 훨씬 더 큰 해악을 나라에 끼치게 된다. 권세가들은 적어도 공식적인 지위에 있기 때문에 언행이 쉽게 드러나고 여기에 대한 견제와 비판도 작동할 수 있지만 비선 실세가 저지르는 잘못은 심각한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조선의 비선 실세 중 우선 거론할 수 있는 사람은 정난정(鄭蘭貞)이다. 명종의 외숙부 윤원형의 첩이던 그녀는 본처를 독살하고 마침내는 정경부인의 작호까지 받았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각별한 후원을 받으며 이권 사업에 매달렸는데 정치 공작에도 능해 을사사화 등에 개입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10). 그러다가 문정왕후가 죽고 남편인 윤원형도 몰락하면서 자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명종20.11.3).
후궁이나 종친이 비선 실세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원칙적으로 임금을 제외한 왕실의 일원들은 정치 개입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다. 하지만 임금의 지근거리에 있고 임금에게 영향을 끼치기 쉬운 만큼 ‘그림자 권력’이 될 가능성도 상존했다. 인조 때 귀인 조씨, 영조 때 숙의 문씨 등이 대표적이다. 임금의 총애를 기화로 정사에 개입하고 조정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나갔던 이들은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욕심을 내다가 몰락하게 된다.
‘삼복(三福)’이라 불렸던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 복평군(福平君) 이연(李) 삼형제는 인조의 적손(嫡孫)으로 각각 큰아버지인 효종, 사촌형인 현종, 종질인 숙종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으면서 비선 실세로 떠올랐다. 특히 현종은 ‘복창군 형제를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할’(현종대왕행장) 정도였는데 이로 인해 이들에게 청탁과 뇌물이 집중되게 된다. 하지만 삼복은 자제할 줄 모르고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정쟁에 얽혀 사사됐다.
이후 조선 말엽, 비선 실세의 정점을 찍는 인물이 나타난다. 요즘 세간에 많이 거론되고 있는 진령군(眞靈君)이다. 본명이 박창렬인 진령군은 고종 때 활동했던 무당으로 명성황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오군란 당시 진령군은 충주에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를 찾아가 환궁하는 시기를 예언한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명성황후가 그녀를 데리고 궁궐로 돌아온 것이다.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깊이 믿고 의지했는데 두 사람은 날로 친숙하게 되었고 중전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말 한마디에 화복(禍福)이 걸려 수령과 변장(邊將, 지방의 군사지휘관)의 자리가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고관대작들이 그에게 아부해 수양아들로 삼아달라고 보채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매천야록(梅泉野錄)]1). 고종도 점차 진령군에게 빠져들었는데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다는 죄를 받았지만 고종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고종31.7.5).
당연한 귀결이겠으나 명성황후와 고종의 기대와는 달리 진령군의 신통력은 자신들과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됐고 고종은 망국의 군주가 됐다. 위기와 직면해 주술과 예언에서 길을 찾으려 한 것은 해결이 아닌 도피다. 더욱이 그것으로 국정의 향방을 결정하려한 것은 국가의 공적 기능을 마비시킨 중대한 패착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