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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출토 와당에 中 연호… 낙랑의 평양 소재설 뒷받침”

바람아님 2016. 12. 13. 23:20

동아일보 2016-12-13 03:00:00


‘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 책 펴낸 유창종 변호사

‘기와 검사’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이 9일 열린 동북아역사재단 상고사 토론회에서 낙랑군이 요동 혹은 요서에 있다가 평양으로 옮겨졌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역사를 수사한다.’

 재야와 강단,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 이견이 끊이지 않는 고대사의 쟁점을 범죄를 수사하는 검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검사로 일하면서 40년 가까이 와당을 수집해 ‘기와 검사’라는 별명이 붙은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71·법무법인 세종 변호사·전 서울지검장). 그가 최근 ‘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경인문화사)을 내고 9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상고사 토론회에서 책의 주요 내용을 발표했다.

 “비주류 사학에서는 중국 요서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돼 멸망 때까지 존속했다고 보지만 이는 평양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등이라고 쓰인 와당이 출토된 것과 모순됩니다.”

 유 관장은 평양 출토 와당을 분석해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비주류 학설을 비판했다. 평양에서 ‘대진원강(大晉元康)’이라고 쓰인 와당이 출토돼 서진의 혜제가 원강이라는 연호를 쓰던 기간(291∼299년)에도 평양에 중국 왕조의 관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등 와당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와당은 왕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건축물에만 사용됐고, 다른 유물과 달리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는 일이 거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유 관장은 “와당은 발견된 장소에 국가의 관서나 그에 준하는 기관 등의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유 관장은 유금와당박물관(서울 종로구 창의문로11가길)에 평양에서 나온 와당 33점을 소장하고 있다.

 유 관장은 또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 와당이 위조된 것이라는 비주류설도 논박했다. 낙랑예관 등의 와당은 절당법(와당과 수키와를 접합한 부위의 절반을 실이나 대나무 칼로 절단해 만드는 기법)으로 제작됐는데, 낙랑군이 있던 시대에 이 기법이 사용됐다는 사실은 20세기 말에야 드러났다는 것이다. 유 관장은 “만약 20세기 초 와당들이 위조됐다면 당시 지식수준으로 보아 절당법으로 와당을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관장은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封泥)가 요서에서 출토된 점 등을 고려하면 낙랑군은 요서나 요동에 있던 왕검성에 잠시 설치됐다가 나중에 마지막 왕검성(평양)으로 옮겨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그는 대동강 유역 고구려 와당이 장기간 변화 발전했고, 문양과 예술성 등이 중국 남북조 와당보다도 앞선 점으로 보아 평양을 고구려의 주된 수도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또 6세기 말∼7세기 초 일본 와당도 한국계 와당을 모방하는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유 관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동북아재단에 “고조선 연구소를 설립해 우리 민족과 역사 정체성의 핵심 과제인 고조선의 실체와 정통성 계승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해 달라”고 주문했다.

조종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