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行·탐방·名畵/기행·여행.축제

[해외문화 기행] (11) 로마 나보나 광장‥베르니니의 선공, 보로미니의 복수…광장은 그렇게 태어났다

바람아님 2013. 8. 15. 13:46
가축 물먹이던 허름한 광장에 베르니니가 '4대강 분수' 설계
자존심 상한 거장 보로미니…분수에 어울리는 파사드 건축                


"빌어먹을! 저 볼품없는 성당이 언제나 내 눈앞에서 사라진담."
베르니니는 저택의 창문을 열 때마다 눈앞을 가리는 산타그네제 인 아고네 성당의 거대한 돔과 좌우의 종탑에 울화가 치민다.

그것은 분노의 수준을 넘어 이제 마음의 고질병이 돼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40대 초반까지 출세가도를 달리던

베르니니.그는 성 베드로 사원의 종탑 건설의 실수로 일시에 교황의 지지와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잃어버렸다. 하중을 무시한

거대한 종탑 건설로 건물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그의 오류를 앞장서서 비난하고 나선 사람은 라이벌인 보로미니였다. 보로미니는 스승인 마데르노의 뒤를 이어 자기보다

건축 지식이 빈약한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성당 공식건축가가 된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보로미니는

2인자의 설움을 씻는 한편 새로 즉위한 이노켄티우스10세 교황의 총애를 받아 최고의 건축가로 군림하게 된다.

바로크 시대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무대로 진검승부를 겨뤘던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어느 모로 보나 명실상부한

라이벌이었다.

 


두 경쟁자가 가장 첨예하게 부딪친 곳은 로마 시내 서쪽 테베레 강과 지척에 있는 나보나

광장이었다. 이곳은 성 베드로 성당 건설의 오류로 인해 10여년간 주요 건축공사에서

배제돼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베르니니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었다.

나보나 광장은 길이 300m,폭 50m의 장방형 광장으로 로마시대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곳인데 마상 창시합 같은 각종 경기가 벌어진 곳이었다. 15세기 말에는 캄피톨리오

광장에서 열리던 노천시장이 이곳으로 옮겨와 소란스럽고 지저분한 동네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광장의 중심에는 가축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물통이 설치돼 여름에는 악취가

진동하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이노켄티우스10세는 교황에 오르기 전 이 광장에 자신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교황이 되자 이곳을 자기 가문의 영광을

기리는 본거지로 삼기로 하고 대대적인 정비에 나선다. 그는 먼저 저택 부근의 집들을 사들여 팜필리 궁전으로 확장한 다음

이 광장의 중심에 있는 가축용 물통을 치우고 그 자리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활용해 기념비적인 분수를

건설하고자 했다.

보로미니는 여기에 인류문명의 발상지를 흐르는 4대강의 분수를 세우자고 건의했다. 교황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몇몇

예술가들에게 분수 디자인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그 안에 베르니니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들 보로미니의 디자인이 선정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베르니니의 디자인이 채택됐다.

베르니니를 지지하는 한 유력자가 교황이 보로미니의 디자인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는 교황이 지나치는

곳에다 베르니니의 분수 디자인을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교황은 그것을 보자마자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즉시

베르니니를 불러들였다. 베르니니의 눈물의 세월은 이렇게 해서 끝이 났다.

이 결정에 대한 보로미니의 반응은 거의 발광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4대강

분수의 아이디어를 짜낸 것은 그였고,교황의 명에 따라 그 자리에 어렵사리 관개공사까지 마무리한 것도 그였기 때문이다.

교황이 베르니니의 분수에 그토록 열광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보로미니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베르니니 디자인의

역동성에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네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강의 신' 네 명의 역동적인 자세는 보는 이들을 흥분시킨다. 이 분수

하나가 들어섬으로써 산만하고 맥 빠진 느낌을 줬던 광장은 강력한 구심점을 가짐과 동시에 생동감 넘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보로미니에게도 다시 기회가 왔다. 교황이 라이날디 부자에게 팜필리 궁전 옆의 자그만 교회당인 산타그네제 인 아고네 성당의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명했는데 정면 파사드를 너무 높이 설계해서 돔 지붕이 가려지게 된 것이었다. 결국 1653년 공사 책임을

맡았던 카를로 라이날디가 해고되고 보로미니는 교황의 부름을 받게 된다. 그는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기막히게 아름다운

파사드를 고안해냈다. 특히 성당 바로 앞에 베르니니가 세운 4대강 분수와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했다. 보로미니는

그렇게 베르니니에게 아름다운 복수를 했던 것이다.

두 거장의 경쟁 덕분에 나보나 광장은 로마의 어느 곳보다 활기차고 낭만이 넘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활기를 띤다. 그래서 이 길다란 공간은 오늘도 로마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식공간으로 인기가 높다.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

야외 카페에서 햇빛을 받으며 차 한 잔 마시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젤라토를 손에 들고 산책을 즐기는 젊은 소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도 그림 같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이곳에서 다시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곧 테베레 강에 도달하고 저만치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보나 광장이 원숙기의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경쟁을 벌인 곳이라면 성 베드로성당은 야심만만했던

30대의 두 천재가 실력을 겨뤘던 무대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 유산치고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은 찾기 힘들다.

나보나 광장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결실을 이뤄낸 곳이다. 그 상쾌한 공간의 한가운데 서보라.그러면 당신은 어느 새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연출한 무대의 행복한 주인공이 돼 있는 자신을 발견하리라.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한경기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