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자, 신발끈 조일 준비 하길
세상 좋아졌다. 이젠 관광이나 사업차 잠깐 미국에 갈 경우 비자 면제다. 예전처럼 대사관 앞에서 긴 줄을 안 서도 된다는 얘기다. 다만 3개월 이상 체류하려면 160달러, 근 20만원짜리 비자를 받아야 한다. 이에 비해 중국 비자는 훨씬 싸다. 단수방문은 30달러, 6개월짜리 복수방문 비자도 60달러다. 하지만 늘 후한 건 아니다. 중국 비자를 위해 140 달러를 내야 하는 나라가 있다. 유일하게 미국이다. “너희만큼 우리도 받겠다”는 대륙의 배포가 와락 느껴진다.
우린 어떤가. 상호주의에 따라 미국인의 단기체류의 경우는 우리도 면제해 준다. 단기체류가 아닐 경우 비자가 필요하지만 45달러밖에 안 된다. 미국을 대하는 자세에서 바다 같은 한·중 간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왠지 서글프다.
“우리는 결코 미국 못지않다”라는 중국의 자세는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다. 부대사란 호칭을 둘러싼 에피소드도 그중 하나다. 국제 무대에서 부대사란 직책은 없단다. 그런데도 유독 이 땅에서는 1960년대부터 미 대사관 2인자를 ‘부대사’라고 높여 불러 왔다. 한데 그동안 가만 있던 중국 대사관에서 지난 4년 전부터 슬쩍 부대사란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에 지지 않겠단 심리가 발동한 모양이다.
미국에 대해 한국은 저자세인 반면 중국은 대등하게 나간다는 인식은 이제 고정관념처럼 굳어졌다. 고정관념은 사고를 굴절시켜 잘못을 저지르게 한다. 최근 미국의 반도체 기업 퀄컴이 중국에 이어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해 1조원 이상의 과징금을 맞은 사태에서도 그런 부작용이 나타났다.
두 나라에서 엄청난 과징금을 맞자 퀄컴은 중국 결정은 순순히 받아들인 반면 한국 당국에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를 두고 상당수 언론은 “국력 차이로 퀄컴이 다르게 나온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한 자락만 들추면 얘기가 다르다. 언뜻 봐서 비슷할지 모르지만 퀄컴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케이스다. 중국에선 로열티가 너무 높으니 낮추라는 게 다였다. 퀄컴으로서는 기존 거래업체로부터의 수입은 줄지만 중국 당국의 제재로 손 놓고 있던 다른 회사로부터는 로열티를 받게 돼 전체 수입은 되레 늘게 됐다. 기쁘지 않을 턱이 없다.
반면에 한국은 로열티 과다 외에도 퀄컴이 자사의 특허기술을 다른 경쟁업체가 못 쓰게 막은 것을 문제 삼았다. 퀄컴의 비즈니스 모델까지 규제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특히 퀄컴은 이 논리를 중국에서 받아들여 또다시 규제에 나설 것을 가장 우려한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해 7월 중국 당국은 공정위와 접촉해 퀄컴에 대한 제재 논리를 듣고 갔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위는 “반독점 규제는 모든 주요 국가가 시행하는 것으로 통상 마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 생각이다. 문제는 미국에서 이를 무역전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퀄컴 과징금 결정 직후 LA 타임스를 비롯해 많은 미국 언론이 “한국과의 무역전쟁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가뜩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한국에만 유리하게 돼 있다며 메스를 가할 날만 기다려 온 도널드 트럼프 차기 대통령이 곧 취임한다. 이런 판에 퀄컴을 제재한 것은 무역전쟁을 앞두고 한국이 선제공격을 날린 것과 진배없다.
통상 이익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국제 관례도 무시하는 게 미국이다. 우리도 최근 뼈 아프게 당했다. 모든 나라가 지지하는데도 세계무역기구(WTO) 재판관 장승화 서울대 교수의 연임을 미국이 반대해 좌절된 게 그 실례다.
법대로 판단했다면 이번 공정위의 결정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다만 이번 사태로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보복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더욱 거칠게 닥쳐올 가능성이 커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제 외교 및 통상 담당자들이 막아낼 일만 남았다. 신발끈을 동여매야 할 때가 예상보다 빨리질 것 같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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