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한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인 안면도(安眠島)는 원래 섬이 아니라 태안반도 끝에 붙은 곶으로 육지와 연결된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5세기에 걸친 끝없는 운하공사 끝에 오늘날 안면대교가 놓인 곳에 위치한 판목운하가 개통되면서 1638년부터 섬이 됐다.
육상교통이 발달한 현재로서는 일부러 물길을 파내 멀쩡한 육지를 섬으로 만든 것이 좀체 이해되기 어렵지만 당시 판목운하의 개통은 국가경제에 매우 중요한 시책이었다.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전라도의 세곡을 조운선(漕運船)으로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지역은 70% 이상이 산지로 구성돼있고 주요 하천이 동서로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육상교통이 발달하기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러다보니 일찍부터 해운 수로를 이용한 수송이 발전했다. 후삼국이 통일된 고려시대에는 남부지역의 세곡을 모아 서해안에서 조운선에 싣고 곧바로 수도인 개경으로 수송했다. 조선시대에도 주로 이런 방식으로 조운선이 운영됐다.
이러한 조운선들은 대체로 해안가에 바짝 붙어 이동했기 때문에 난파 위험이 크지 않았지만 딱 한 해역이 문제였다. 바로 서해 앞바다에 툭 튀어나온 태안반도를 지나갈 때였다. 안면도가 섬이 되기 이전엔 전라도에서 그대로 해안선을 따라 죽 올라가면 안면곶 안으로 들어가고 바닷길이 여기서 끝난다.
경기도 지역으로 올라가려면 태안반도 끝부분에 위치한 안흥량까지 나가야하는데 그 바다는 서해에서 심청이가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와 함께 극악의 항해코스로 유명했다. 암초가 많아 배들이 자주 침몰했던 것. 조선시대 전기만 따져도 200여척의 조운선이 침몰했고 1200명이 넘는 탑승객이 사망했다.
이로 인한 재정피해도 점점 심각해졌다. 각종 침몰사고로 인해 10만석이 넘는 쌀이 안흥량 앞바다에 쓸려갔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에서도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대책들이 제시됐고 이에따라 나온 것이 운하를 뚫자는 것이었다. 처음 운하공사 이야기가 나온 것은 고려 인종 때인 1134년. 판목운하가 뚫린 1638년까지 5세기가 넘는 기나긴 운하 도전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애초 고려-조선 양대에 걸쳐 계획한 운하 공사는 오늘날의 판목운하가 아닌 안면곶 동쪽의 천수만과 태안반도 북쪽의 가로림만을 단박에 뚫는 굴포운하 공사였다. 그러나 불과 개통 몇 km를 앞두고 만난 단단한 암석층에 가로막혀 결국 굴포운하 공사는 포기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안흥량에서 태안반도 끄트머리에 의항운하를 건설하자는 계획도 나왔지만 이 공사 역시 실패했다.
안면곶 일대에 판목운하를 뚫자는 아이디어는 예전에도 나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 안면곶에 왔다가 훗날 누군가 이 곶의 뒤편을 파낼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인조 16년인 1638년, 당시 충청감사였던 김육이 제안을 올려 시작된 공사는 금새 잘 마무리됐으며 예전에 비해 사고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운하 개통 이후에도 구한말까지 연간 10여차례 가까이 사고가 계속 발생했다. 위험한 항해지역은 피하게 됐지만 조운선 운영 자체에 문제가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임진왜란과 병조호란 등 큰 전쟁을 겪은 조선 조정은 예산 부족으로 조운선 운영 자체를 경강상인 등 지역 해운을 장악하고 있던 상인들에게 외주를 줬다. 그러자 곧바로 조운선 운영은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지방수령들과 결탁한 상인들은 세곡만 날라야 되는 조운선에 편법으로 여러 화물을 같이 끼워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나친 과적으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는 배들이 속출했던 것. 다산 정약용은 "안흥량에서 파선되는 배가 해마다 10여척이 나오는데 수령들이 가외의 짐을 싣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운하를 뚫어 더 이상 해상사고가 없이 베게를 높이 베고 편히 잘 수 있게됐단 의미에서 붙은 '안면도'란 지명은 이러한 무책임한 운영으로 무색하게 돼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천재지변은 기술로 막을 수 있지만 인재(人災)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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