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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락부락한 얼굴' 경주 괘릉 이국적 석상의 모델은

바람아님 2017. 1. 23. 00:50
연합뉴스 2017.01.22 09:01

임영애 교수 "서역인 아닌 불교 수호신상 보고 제작"
경주 괘릉 무인석.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가 서역, 즉 중국의 서쪽 지방과 교류했다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는 유물이 두 개 있다. 1973년 경주 황남동의 고분에서 출토된 계림로 보검(보물 제635호)과 불국사 인근의 괘릉에 서 있는 무인상이다.

괘릉은 통일신라시대 원성왕(재위 785∼798)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주변에는 신라왕릉 조각에 등장하는 석물들이 잘 갖춰져 있는데, 유독 무인상의 모습이 이국적이다. 부리부리한 눈과 덥수룩한 수염, 우락부락한 얼굴이 영락없는 서역인의 이미지다.


22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연구서 '조선왕릉 석물조각사(Ⅰ)'에서 괘릉 무인상의 모델은 서역인이 결코 아니라고 반박한다.

경주 괘릉 무인석.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임 교수는 우선 괘릉 무인상이 서역인을 본뜬 것이라면 석상이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9세기 중반 신라에 서역인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무렵 당나라는 서역인의 활동을 단속했고, 신라 역시 혼란기였기 때문에 서역인이 신라에 거주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임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설령 서역인이 신라에 왔더라도, 그들의 목적은 장사였다"면서 "신라 왕실에서 왕릉을 조성하면서 낮은 신분의 서역인을 왕릉 앞에 재현해 수호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8세기 전반 당의 수도에 2만∼3만명의 서역인이 생활할 때도 중국 황제릉 앞에 서역인을 닮은 석상을 세우지 않았다"며 "11세기에 아랍 상인이 한반도에 왔을 때도 그들의 특이한 얼굴을 미술품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임 교수는 괘릉 무인상의 복장도 서역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한다.


그는 무인상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허리에는 주머니를 차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복식은 오히려 전형적인 중국식 복장에 가깝다"고 말한다.

경주 괘릉.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렇다면 용모가 범상치 않은 괘릉 무인상은 무엇을 보고 제작한 것일까.

임 교수는 사찰 입구에서 수호신 역할을 담당한 금강역사가 괘릉의 진짜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신라왕릉 조각에는 불교미술의 영향이 강하게 투영돼 있다"면서 "특히 원성왕은 불력(佛力)에 의해 왕이 된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신라인들이 중국인이 만든 금강역사상이나 사천왕상을 접한 뒤 이를 바탕으로 괘릉 무인석을 창조해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괘릉 무인상이 서역인이라면 이국적인 모습의 감은사 사리기 사천왕상이나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모델도 서역인이어야 한다"면서 "서역인이 신라왕릉의 수호를 맡아야 할 당위성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감은사 사리기의 사천왕상.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