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1.24 길해연·배우)
할머니 댁은 6시간 넘게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었다.
그래도 가는 길이 힘들지 않게 느껴진 까닭이 있었다.
밤만 되면 사랑방에 모이는 동네 할머니들이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들의 기억은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변형시키곤 했다.
구렁이가 한 사람만 더 잡아먹으면 사람이 되려는 찰나,
억울하게 연못에 빠져 죽은 색시의 원을 풀어 주었던 사또가 등장해 판을 깨는 식이다.
여우가 재주를 넘는 결정적 순간에 "그래서 어떻게 됐더라?" 하고 되묻기도 하셨다.
"조금 있으면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두꺼비 앞에서 재주를 넘겠구먼." 다른 할머니들이 추임새처럼 말을 잇는다.
기승전결 희미한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한가득 이고 서울로 돌아오면 나는 그걸 또 재구성하고 각색했다.
동네 친구들에게 들려주기 전날 밤이면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느라 밤을 꼴딱 새우기도 했다.
'옛날 옛적 동네에 한 총각이 있었는데…' 대부분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를
"옛날 옛적 구운리라는 곳에 똘이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어."
이런 식으로 바꾸고, 지나가는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에게도 정성을 들여 이름을 만들어주곤 했다.
이 버릇은 커서 연극을 할 때도 계속 됐다.
마을 사람 1, 직원 2…. 잠시 나오는 역할에도 이름을 넣어 주자며 작가를 조르거나 여의치 않으면
우리끼리라도 지나가는 역할에 이름을 붙여 주곤 했다.
무대에 등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이유 없이 나왔다 들어갔다면, 그 공연은 좋은 공연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 사람의 이름이 무언지 관객은 굳이 몰라도 된다. 잠깐의 등장이지만 '지나가는 사람 1'이 등장한
연극과 제 각각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 연극은 공연의 풍성함에 분명 차이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매일매일 스치는 수많은 사람,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엄연하게 자신만의 이름이 있고 각자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자. 누군가를 쉽게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일이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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