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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월호] "청나라-만주국은 곧 '우리 민족사'다"

바람아님 2017. 1. 28. 23:58
중앙일보 2017.01.28 00:01

이론(異論)의 역사

청 황가 시조 탄생설화인 ‘세 선녀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역사… 신화 속 청 황가 ‘포고리옹순’은 누르하치의 6대조이자 조선 태조 때 회령 여진부락 지방관을 지낸 ‘맹가첩목아’다!

지난호에서는 청(淸) 시조(始祖)의 기원설화인 ‘삼선녀(三仙女) 이야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영웅’ ‘포고리옹순’이 회령의 지방장관이었던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같은 지방에서 살고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 시기 또 한 명의 인물이 청나라 사서에 등장한다. 그 이름은 ‘두두 멘터무(都督孟特穆, 도독 맹특목)’. 그 역시 누르하치의 6대조다. 그렇다면 맹가첩목아와 두두멘터무는 어떤 관계일까?
<만주원류고> 등은 포고리옹순 가문을 ‘금(金)나라의 남은 부락’ 출신이라고 기록했다.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웠을 무렵 동북아 제국의 영역.
지난 월간중앙 1월호에서 우리의 전래동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 청(淸) 시조의 기원설화인 ‘세 선녀 이야기’의 줄거리가 매우 비슷하다는 점을 보았다. 아울러 ‘세 선녀 이야기’에 나오는 포고리옹순(布庫里雍順)은 우리 회령 지방 사람임을 살폈다. 즉, 만주 황실의 ‘세 선녀 이야기’는 함경북도 회령 지방을 무대로 한 주인공 포고리옹순의 개국설화임을 밝혔다. 나아가 포고리옹순이 조선 태조 때 함경북도 조선 회령의 지방관이었던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같은 지방에 살고 있었음도 밝혀냈다. 이번 호에서는 이야기를 이어 포고리옹순의 더욱 정확한 실체를 더듬어 본다.

홍타이지(皇太極)의 천총(天聰) 9년(1635)에 편찬된 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포고리옹순에서 ‘몇 세대 후 (曆數世後其子孫)’ (…) 그 자손 중 한 아이가 있어 이름을 범찰(樊察)이라고 했는데, 삼성인(三姓人)들을 잘못 다스려 반란이 일어나 족속이 몰살 당하고 (…) [이 때문에] 범찰이 빠져 나가 몸을 숨겼다. (…) 그 후 그(범찰의) 손자 두두 멘터무(都督孟特穆, 도독 맹특목)는 (…) 할아버지 원수(祖仇)의 자손 40명을 숙수후하(蘇克素護河, 소극소호하, ‘갈매기물’)의 훌란하다(呼蘭哈達, 호란합달, ‘고려봉’) 아래 허투알라(赫圖阿拉, 혁도아라, ‘엇비슷하게 누운 바위산’)로 유인해 그 반을 죽여 설욕하고, … 허투알라에서 살았다. 두두 멘터무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이름이 충선(充善, 만주어 ‘주샨’, 곧 ‘조선’)이고 둘째는 저연(?宴, 만주어 ‘조션’, 역시 ‘조선’과 같은 ‘숙신’)이다.”


두두 멘터무. 이번 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요 인물인 두두 멘터무는 누구인가? 그는 <만주실록>에서 포고리옹순의 후손 범찰(攀察)의 손자로 나오는 인물로, 청 태조 아이신교 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 1559.2~1626.9)의 6대조다. <만주실록>은 위 기록에 이어 두두 멘터무 이후 누르하치에 이르기까지 6대의 계보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만 주실록>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청 황가는 시조 포 고리옹순을 시작으로 ‘몇 세대(曆數世)’ 아래 범찰이 있고, 범찰의 손자가 두두 멘터무이며, 두두 멘터무의 6대 후손이 청 태조 누르하치인 셈이다. 곧 포고리옹순은 누르하치의 대 략 8대 이상 선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나중에 편찬 된 청의 공식 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만주실록> 에 나타난 이 같은 계보를 부인하는 듯, 인용하지 않았다. 왜 일까?


또 하나 중요한 기록이 있다. 만주 황실 가계에 관한 한 가 장 긴밀한 정보를 담은 조선의 <정조실록> 1787 (건륭 52) 년 기사다. 흥미롭게도 청 시조 포고리옹순의 추존호가 ‘조조 원황제(肇祖原皇帝)’라는 내용이다. 당시 청 건륭제는 황가 의 청조 개국 역사를 정리한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略)> 이라는 사서 편찬을 명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황청개국방 략>의 편찬작업은 수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누르 하치 이전 6대까지는 계보가 명확하나 그 이상의 계보에서 혼선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이 같은 사실을 청 조정에 대한 밀탐을 통해 알아내고 <정조실록>에 기록했던 것이다.


고려 말~조선 초를 살아간 두두 멘터무 포고리옹순의 추존호가 조조원황제라는 기록은 포고리옹 순의 역사적 정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다. <만주실록> 계열의 사서들은 조조원황제를 누르하치의 6 대조라고 분명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 세 선녀 이 야기’의 영웅 포고리옹순이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와 같은 인물임을 말해준다. 포고리옹순이 누르하치의 8대조 이상 선 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 황가의 청조 개국 역사를 정리한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略)>이라는 사서 편찬을 명한 건륭제.
조선의 문신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도 ‘잡록 건주록(雜錄 建州錄)’에서 <정조실록>의 내용과 부 합하는 사설을 싣고 있다. “건주조신(建州女直)의 시조[곧 청 황실의 시조]인 포고리 옹순은 그 때를 상고해볼 때 아하추(阿哈出, 아합출, 카가씨= 대씨) 시대를 넘지 못한다. 또 말하기를 몇 세대를 지나(又曰 越數世) 무리를 제대로 어루만지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 두 반란을 일으켜 종족을 죽이고 해를 입히니, 어린 아들(아 이)이 하나 있어 거친 들판으로 숨어들었는데, 신령스런 까치 가 그 머리 위에 내려앉자 추적하던 사람들이 그가 말라 비틀 어진 나무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마침내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곧 일곱 성씨의 반란(七姓之亂)인데, 동창(童倉, 곧 청 사서의 ‘充善’)과 범찰(凡察, Fancha, 왕족장)이 우리에게로 ‘아하추’는 조선 태종 시기인 1409~10년경 건주여진의 5 부족 중 하나인 호리개로(胡里改路, 만주어 ‘훌하’부) 부족 장이다. 그는 누르하치의 6대조인 두두 멘터무의 조선 측 기 록명인 오음회(吾音會) 지방의 알타리(斡朶里)=오도리(吾都 里) 두만(豆漫)=만호(萬戶) 협온(夾溫) 맹가첩목아(猛哥帖木 兒)와 같은 시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정조실록>은 ‘조조원 황제 포고리옹순’이 사실은 고려 말~조선 초를 살아간 누르 하치의 6대조인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런데 청의 사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듯 청 사서에 등 장하는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는 곧 <조선왕조실록>에 등 장하는 맹가첩목아다. 또 <건주록>은 포고리옹순과 두두 멘 터무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어쩌면 같은 인물이 역시 같 은 시대를 살아갔다는 사실도 전해준다.


또 <청사고>는 “[장백산의 동 오막혜 땅의 오타리로 내려 온] 시조 포고리옹순의 (…) 만주(滿洲)는 이로부터 시작되었 다. 원나라는 그 땅에 군민만호부(軍民萬?府)를 놓고, 명 초 에는 건주위(建州衛)를 두었다”고 기록했다. 포고리옹순이 만주를 건국하고 그 땅에 살 무렵 ‘원나라가 만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해는 공양왕(恭讓王) 2년, 곧 1390 년으로 공양왕이 오늘날 회령(會寧) 경내의 한 마을인 악다 리성(鄂多理城) 주변에 ‘웅길주등처 관군민만호부(雄吉州等 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한 해다.


<청사고>가 포고리옹순 시 대에 설치됐다고 기록한 ‘군민만호부’는 바로 공양왕이 설치 한 ‘웅길주등처 관군민만호부’인 것이다. 즉, 포고리옹순은 공양왕 시절인 1390년경 당시의 웅주(雄州)와 길주(吉州), 그 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회령 경내의 한 마을인 악다리성에 와 서 ‘삼성여진’을 다스리며 살았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정 조실록> <건주록> <청사고> 등에 따르면 <만주실록>에 등장 하는 포고리옹순이 살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고려가 망하 고 조선이 세워질 무렵이라는 말이다.포고리옹순이 산 시기는 정확히 언제일까?


한 세대 평균 재생산 기간을 30년이라고 잡고, 청 태조 누르하치가 태어난 시기인 1559년 2월로부터 6세대 전에 포고리옹순이 태어났 다면, 그해는 1397년 [누르하치 탄생해인 1559년- 180년(6 세대 x 한 세대 30년)=1379년]이 된다. 그해는 포고리옹순이 살던 만주에 공양왕이 만호부를 설치한 해인 1390년에서 불 과 11년 전이고, 조선이 탄생하기 13년 전이다. 또한 <만주실 록> 등에서 누르하치의 6대조라고 하는 ‘조조원황제 두두 멘 터무’가 살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조조원황제 두 두 멘터무’는 <정조실록>에 따르면 그 칭호가 같은 ‘조조원 황제 포고리옹순’이며, 둘은 시기적으로도 같은 때를 살아간 사람이다. 그런데‘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는 또 조선 측 사 서에 “오음회(吾音會) 오도리(吾都里) 만호(萬戶) 맹가첩목 아(猛哥帖木兒)”라고 기록된 인물이다.


결국 세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왜 그런지 이 들 세 인물의 공통점을 정리해보자. 이들의 공통점은 적어도 5 가지나 된다. 첫째, 같은 시대를 살아갔다. 둘째, 모두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 셋째, 동일한 행적을 남겼다. 넷째, 이들 중 적어도 둘은 그 추존호가 ‘조조원황제’로 같다. 다섯째, 가문 의 계보도 같다. 이러한 사실은 포고리옹순·맹가첩목아·두두 멘터무 등 세 인물이 사실은 같은 인물임을 보여준다.


시대, 장소, 행적 일치하는 ‘포고리옹순’과 ‘동맹가첩 목아’ 우선 포고리옹순이 살아간 땅의 위치에 관해서는 지난 1월 호에서 자세히 다뤘다. 포고리옹순은 백두산(白頭山) 천지 (天池, 불후리 오모, 포륵호 못)에서 세 선녀 중 막내인 페쿨 렌(佛庫倫)에게서 태어나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배를 타고 두 만강을 따라 동으로 가서 백두산 동남의 오막혜[오음회(吾音 會), 회령] 지방에 있는 삼성(三姓) 여진 부족의 마을 아타리 (오도리, 알타리)성에 정착하여 만주를 개창하고 살았다. 그 러므로 그의 고향은 우리 땅 백두산과 회령이라는 사실이었 다. 이곳은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백두산 동남 오 음회(吾音會, 회령) 오도리(吾都里) 만호(萬戶) 동맹가첩목아 (童猛哥帖木兒)’가 살아간 지방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만주실록> 등에 기록된 포고리옹순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동맹가첩목아의 행적이 정확히 일 치한다는 사실이다. <청사고> ‘본기 1’ ‘태조본기’ 등 청 사 서에는 “포고리옹순에서 몇 세대를 지나(越數世)” 포고리옹 순의 종족이 그 삼성(三姓) 무리를 제대로 못 다스리자, 무리 가 반란하여 종족이 모두 살해당하고, 어린 아들 범찰(范察) 이 도망하였다고 한다. 청나라 사서는 이 범찰이 누르하치의 6대조인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 곧 ‘맹가첩목아’의 할아 버지 세대라는 취지로 말한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맹가첩 목아의 아비가 다른 아우로 등장하는 범찰(凡察)은 청나라 사서에서는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의 몇 세대(又數世) 선조 라고 기록된 범찰(范察)과 같은 이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청태조실록> ‘권지일(卷 之一)’등에서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의 할아버지로 나오 는 범찰(范察)은 포고리옹순 가문이 다스리던 ‘삼성(三姓) 여 진부락’이 난리를 일으키자 도망갔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에도 ‘칠성(七姓) 여진부락’이 난리를 일으키는 바람에 맹가 첩목아는 죽고, 그 아우 범찰(凡察)과 아들 동산(童山)이 난 을 피해 회령부(會寧府) ‘알목하(斡木河)’에서 조선의 내지 ‘경원(慶源)’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두 사서에 등장하는, 같은 가문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 의 범찰(范察)이 경험한 ‘삼성(三姓)부락의 난’은 알타리부락 맹가첩목아의 아우 범찰(凡察)이 겪은 ‘칠성(七姓)의 난’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렇다면 세 사람에 관해 <표1>과 같은 그림 이 그려진다.

<만주실록>과 <대청태조실록> 등에서는 포고리옹순이 누 르하치의 8대조 이상 선조라는 투로 시작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포고리옹순과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오음회 오 도리 만호 맹가첩목아는 정확히 같은 가문에 속한다. 반면, 포고리옹순이 누르하치의 8대 이상 선조라는 <만주 실록> 등의 기록은 그 자체가 전설로 표현돼 모호할 뿐 아니 라, 조선 측 기록의 맹가첩목아와 동일인물인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의 계보에도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 다른 사서 들이 말하는 포고리옹순이 살아간 시기와도 배치돼 역사적 신빙성이 부족하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아 주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정리하면 청 사서 <만주실록> 계열이 말하는 포고리옹순 은 정< 조실록>에 등장하는 조조원황제 포고묵옹순(布庫默 雍順)이고, 이 인물은 다시 <만주실록> 등이 말하는 조조원 황제 두두 멘터무다. 나아가 이 두두 멘터무는 조선 태조 시 기 알타리부락의 맹가첩목아와 같은 인물이다. 또 청 사서가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의 할아버지로 시조 포고리옹순에 서 몇 세대 지난(越數世) 후예”라고 기록한 범찰(范察)은 조 선 사서에서는 두두 멘터무와 동일인물인 맹가첩목아의 아 우 범찰(凡察)이다. 또 포고리옹순의 어린 아들 범찰(范察)과 맹가첩목아 아우 범찰(凡察)이 겪은 여진(女眞)의 반란사건 도 같은 사건이다.
이렇게 해서 ‘세 선녀 이야기’에 등장하는 청 시조 포고리 옹순은 조선 태조 이성계 시절 회령 지방의 여진 통치자 ‘동 (童)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라는 ‘역사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포고리옹순은 설화 속 영웅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 던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신화는 처음부터 신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이다.

포고리옹순의 어머니 ‘페쿨렌’은 맹가첩목아의 어머니 ‘야오거’ 그렇다면 ‘세 선녀 이야기’ 설화에서 포고리옹순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막내선녀 페쿨렌(佛庫倫) 역시 역사 속 인물로 찾 아볼 수 있다. 지난 호에서 보았듯 <만주원류고> 등은 청 태 조 누르하치의 전설적 선조 아이신교로 포고리옹순 가문을 ‘금나라의 남은 부락(金遺部)’ 출신이라면서도 그 부모에 관 해 오직 어머니만 ‘막내(季女) 천녀(天女) 페쿨렌’이라고 밝 혔다. 그의 아버지는 붉은 과일을 물고 온 ‘신령스런 까치’로 표현하여, 그의 탄생을 신화화했다. 선녀 ‘페쿨렌’은 누구인가?


포고리옹순이 <태조실록> 등에 등장하는 ‘오도리 만호 동 맹가 첩목아’라면 전설 속의 포고리옹순의 어머니 페쿨렌은 당연히 맹가첩목아의 어머니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세종실 록> 1438년(세종 20년) 7월 29일자 세 번째 기사에는 맹가첩 목아의 어머니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야오거 (也吾巨)’! 바로 이 여인이 선녀 페쿨렌, 곧 만주어로는 ‘페(fe, 佛)-구룬(庫倫, 쿨렌)’, 곧 우리말로 ‘옛-구려(옛-나라)’라는 이름의 여인이다. 이 기사는 맹가첩목아와 배는 같으나 아버 지가 다른 형제인 범찰(凡察)에 관해 보고하면서 그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전지하기를 ‘이제 들으니 범찰(凡察)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같은 아비의 아우가 아니면서, 동창(童倉, 맹가첩목아의 아들-필자주)이 어리고 약할 때 그 관하를 영솔하고 한 부족의 추장(酋長)으 로 있었다 한다. (…) 알타리 일부의 인심이 과연 내가 들은 바 와 같은가? 상세히 갖추어 알리라’ 하였다. 이에 김종서가 답 하여 아뢰었다. ‘범찰의 어머니는 첨이(僉伊, 관직명) 보가(甫 哥, 인명)의 딸 야오거(也吾巨)입니다. 처음에 두만(豆萬, 관직 명, 만호) 휘후(揮厚, 인명)에게 시집가 맹가첩목아를 낳았습 니다. 그러나 휘후가 죽자 그 뒤에 다시 휘후의 어머니가 다른 아우인 용소(容紹, 관직명) 포기(包奇, 인명)에게 시집가 (…) 범찰(凡察)을 낳았사옵니다. (…)

범찰이 맹가첩목아의 한 아 버지의 아우가 아님이 명백합니다.” <세종실록>은 맹가첩목아의 어머니 야오거에 관해서뿐 만 아니라, <만주실록> 등 한 계열의 여러 사서에서 한 마리의 ‘신령스러운 까치(神鵲)’로만 표상된 포고리옹순, 곧 맹가첩 목아의 아버지에 관해서도 알려준다. <세종실록> 1439년(세 종 21년) 3월의 기사는 동맹가첩목아의 아버지인 두만 휘후 의 완전한 성씨와 이름을 ‘동휘후(童揮護)’라고 기록했다. 명 황제에게 고하는 식으로 기록된 이 기사는 다음과 같다.


“동 맹가첩목아와 그 아비 동 휘호(童揮護)와 그 아우 범찰 (凡察) 등은 그대로 본국의 공험진 이남 경성(鏡城) 아목하(阿木河) 지방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신의 조부 선신 강헌 왕(康獻王, 곧 이성계-필자주) 때에 맹가첩목아는 우적합(亐 狄哈, 연해주의 우디게이족)에게 가재 등 물건을 침탈당해 그 수하 백성들이 도망가 흩어져 스스로 존립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신의 조부(이성계)께서 불쌍하게 여겨 맹가첩목아에게 경성등처만호(鏡城等處萬戶) 관직을 제수하고 공해(말 우리)를 지어주며 마주 대하여 거리치[牢子] 등 사환하는 인 구와 안마(鞍馬)·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내려주어 위무해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신의 부친 때는 승진시켜 상장군(上將 軍) 3품 관직을 제수해 호적에 붙이게 했…습니다.” 결국 청 황실의 시조 포고리옹순, 달리 맹가첩목아는 고려 중기부터 속속 고려에 귀부하여 고려 백성으로 살던 여진 부 락에서 첨이(僉伊) 벼슬을 한 보가(甫哥)의 딸 야오거(也吾巨) 라는 여인을 어머니로 하고, 이 야오거의 첫 남편인 두만(豆 萬) 벼슬을 한 동휘후(童揮厚)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역사 적 인물이다.


말갈-맑을국-청나라 전설적 청 시조 포고리옹순의 ‘세 선녀 전설’의 역사적 진실 은 이와 같다. 몽골에도 비슷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칭기 즈칸의 10대 선조 알란 고와의 종족인 코리-부랴트(코리-투 마드)족의 탄생설화는 그 방계 후손 격인 청 황가 시조 전설과 매우 흡사할 뿐 아니라, 또 우리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도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두두 멘터무 등이 안치된 청(?) 영릉(永陵)의 정홍문(正紅門) [중앙포토]
“몽골의 시조 코료도이(고려씨, <몽골비사>의 ‘코리라르다 이 메르겐’)가 바이칼 호를 거닐 때 하늘에서 3마리의 백조가 호수에 내려앉더니 처녀들로 변신해 멱을 감았다. 코료도이 가 그중 한 처녀의 옷을 숨겼다. 덕분에 코료도이는 날아 돌 아가지 못한 그 처녀를 아내로 삼아 11아들과 딸 알란 고와를 낳아 코리-부랴트족이 탄생했다고 한다. 나중에 나이가 든 그 백조처녀는 이제 방심한 남편에게 백조의 옷을 다시 한 번 입어보고 싶으니 그것을 달라고 간청한다. 그간 옷을 숨겨두 었던 코료도이가 ‘당신도 이제 늙었구려. 여러 아들과 딸도 낳았으니’ 하고 숨겨둔 옷을 찾아 주었다. 아내는 그것을 받 자마자 입고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그 후 코리-부랴트 백성 들은 지금도 백조가 오는 겨울이 되면 호숫가에 소젖을 뿌리 며 선조할머니인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몽골의 ‘세 백조처녀 이야기’, 우리의 ‘나무꾼과 선녀’, 또 청 시조의 ‘세 선녀 이야기’의 유사성은 과연 무엇을 말할까?

우리와 같은 뿌리를 나누는 코리-부랴트인들은 스스로를 사 냥꾼과 백조처녀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백두산 출신의 청 황 실은 스스로를 선녀와 ‘신령스런 까치’의 후손으로 여겼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포고리옹순’이라는 이름은 곧 ‘고구려 영웅’이라는 뜻으로, 이름이라기보다 칭호였다. 그의 가문이 바로 청 황가다. 그와 같은 인물로 드러나는 ‘맹 가첩목아’[몽골식 한자소리는 ‘멍커 테무르’, ‘맏것 속말’(粟 末=테무르=속말말갈의 속말), 만주식 한자소리는 ‘멘 터무’] 는 조선 태조 이성계 때 회령 지방의 지방장관이었던 야인(野 人) 추장(酋長)으로 이성계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숙위까지 한 인물이었다.

사조비정(四祖碑亭) [중앙포토]
전설 속에서 ‘선녀’로 등장하는 그의 어머니 는 고려 중기에 귀부한 함경도 지방 여진 부락장의 딸이다. 이 선녀와 그 아들 포고리옹순의 후손인 청 황가가 지은 역사책 <만주원류고>는 서문에서 청나라 황실의 뿌리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황조(我朝)가 성(姓)을 얻어 아이신교로씨(愛新覺羅 氏)라고 했는데, 나라말쌈(國語)에 금(金)을 아이신(愛新)이 라고 하니, 이는 금원(金源)과 동파라는 증거(同派之?)다.” 나아가 이 사서는 청 황실은 ‘대금부족(大金部族)’에서 나 왔다며, 이 대금부족의 ‘금나라 선조(金之先)’는 ‘발해왕(渤 海王)’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청 황실은 금나라 황가의 후 손이고, 그 황가는 ‘발해왕(渤海王)’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발해왕의 대씨(大氏)로 고려 말을 살아가던 그 후손이 선조 세대에 금(金)나라를 세은 것을 기려 ‘금씨(金氏)’로 성씨를 바꾸고 우리 땅 회령과 경성 등에서 살다 후금, 곧 청나라를 건국했다. 그 후 중원으로 쳐들어가 원래 발해의 ‘말갈(靺鞨, 말고을, 몰골, 馬忽, 馬郡, 고구려의 부속령 ‘말갈칠부’)국’이 라는 말과 같은 소리를 가지는 동음이의(同音異意, 같은 소리 의 다른 뜻낱말)의 국명 ‘맑을(淸, 말갈)국’을 동의이언(同意 異言, 같은 뜻의 다른 말)인 ‘청나라(淸國)’로 개칭한 것이다.

1616년 제2의 ‘금나라(후금)’를 건국한 이래 중국 본토로 쳐 들어가 온 중원을 다스리며 329년간 존속하다 지난 세기 전 반기인 1945년에 망한 청나라-만주국은 곧 ‘우리 민족사’인 것이다!


■전원철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했다.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며, 체첸전쟁 당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하는 등 유엔 전문 기관에서도 일했다.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몽골제국의 기원, 칭기스 칸 선대의 비밀스런 역사> 등 다수의 역사 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