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황가 시조 탄생설화인 ‘세 선녀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역사… 신화 속 청 황가 ‘포고리옹순’은 누르하치의 6대조이자 조선 태조 때 회령 여진부락 지방관을 지낸 ‘맹가첩목아’다!
홍타이지(皇太極)의 천총(天聰) 9년(1635)에 편찬된 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포고리옹순에서 ‘몇 세대 후 (曆數世後其子孫)’ (…) 그 자손 중 한 아이가 있어 이름을 범찰(樊察)이라고 했는데, 삼성인(三姓人)들을 잘못 다스려 반란이 일어나 족속이 몰살 당하고 (…) [이 때문에] 범찰이 빠져 나가 몸을 숨겼다. (…) 그 후 그(범찰의) 손자 두두 멘터무(都督孟特穆, 도독 맹특목)는 (…) 할아버지 원수(祖仇)의 자손 40명을 숙수후하(蘇克素護河, 소극소호하, ‘갈매기물’)의 훌란하다(呼蘭哈達, 호란합달, ‘고려봉’) 아래 허투알라(赫圖阿拉, 혁도아라, ‘엇비슷하게 누운 바위산’)로 유인해 그 반을 죽여 설욕하고, … 허투알라에서 살았다. 두두 멘터무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이름이 충선(充善, 만주어 ‘주샨’, 곧 ‘조선’)이고 둘째는 저연(?宴, 만주어 ‘조션’, 역시 ‘조선’과 같은 ‘숙신’)이다.”
두두 멘터무. 이번 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요 인물인 두두 멘터무는 누구인가? 그는 <만주실록>에서 포고리옹순의 후손 범찰(攀察)의 손자로 나오는 인물로, 청 태조 아이신교 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 1559.2~1626.9)의 6대조다. <만주실록>은 위 기록에 이어 두두 멘터무 이후 누르하치에 이르기까지 6대의 계보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만 주실록>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청 황가는 시조 포 고리옹순을 시작으로 ‘몇 세대(曆數世)’ 아래 범찰이 있고, 범찰의 손자가 두두 멘터무이며, 두두 멘터무의 6대 후손이 청 태조 누르하치인 셈이다. 곧 포고리옹순은 누르하치의 대 략 8대 이상 선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나중에 편찬 된 청의 공식 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만주실록> 에 나타난 이 같은 계보를 부인하는 듯, 인용하지 않았다. 왜 일까?
또 하나 중요한 기록이 있다. 만주 황실 가계에 관한 한 가 장 긴밀한 정보를 담은 조선의 <정조실록> 1787 (건륭 52) 년 기사다. 흥미롭게도 청 시조 포고리옹순의 추존호가 ‘조조 원황제(肇祖原皇帝)’라는 내용이다. 당시 청 건륭제는 황가 의 청조 개국 역사를 정리한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略)> 이라는 사서 편찬을 명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황청개국방 략>의 편찬작업은 수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누르 하치 이전 6대까지는 계보가 명확하나 그 이상의 계보에서 혼선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이 같은 사실을 청 조정에 대한 밀탐을 통해 알아내고 <정조실록>에 기록했던 것이다.
이는 곧 일곱 성씨의 반란(七姓之亂)인데, 동창(童倉, 곧 청 사서의 ‘充善’)과 범찰(凡察, Fancha, 왕족장)이 우리에게로 ‘아하추’는 조선 태종 시기인 1409~10년경 건주여진의 5 부족 중 하나인 호리개로(胡里改路, 만주어 ‘훌하’부) 부족 장이다. 그는 누르하치의 6대조인 두두 멘터무의 조선 측 기 록명인 오음회(吾音會) 지방의 알타리(斡朶里)=오도리(吾都 里) 두만(豆漫)=만호(萬戶) 협온(夾溫) 맹가첩목아(猛哥帖木 兒)와 같은 시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정조실록>은 ‘조조원 황제 포고리옹순’이 사실은 고려 말~조선 초를 살아간 누르 하치의 6대조인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런데 청의 사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듯 청 사서에 등 장하는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는 곧 <조선왕조실록>에 등 장하는 맹가첩목아다. 또 <건주록>은 포고리옹순과 두두 멘 터무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어쩌면 같은 인물이 역시 같 은 시대를 살아갔다는 사실도 전해준다.
또 <청사고>는 “[장백산의 동 오막혜 땅의 오타리로 내려 온] 시조 포고리옹순의 (…) 만주(滿洲)는 이로부터 시작되었 다. 원나라는 그 땅에 군민만호부(軍民萬?府)를 놓고, 명 초 에는 건주위(建州衛)를 두었다”고 기록했다. 포고리옹순이 만주를 건국하고 그 땅에 살 무렵 ‘원나라가 만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해는 공양왕(恭讓王) 2년, 곧 1390 년으로 공양왕이 오늘날 회령(會寧) 경내의 한 마을인 악다 리성(鄂多理城) 주변에 ‘웅길주등처 관군민만호부(雄吉州等 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한 해다.
<청사고>가 포고리옹순 시 대에 설치됐다고 기록한 ‘군민만호부’는 바로 공양왕이 설치 한 ‘웅길주등처 관군민만호부’인 것이다. 즉, 포고리옹순은 공양왕 시절인 1390년경 당시의 웅주(雄州)와 길주(吉州), 그 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회령 경내의 한 마을인 악다리성에 와 서 ‘삼성여진’을 다스리며 살았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정 조실록> <건주록> <청사고> 등에 따르면 <만주실록>에 등장 하는 포고리옹순이 살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고려가 망하 고 조선이 세워질 무렵이라는 말이다.포고리옹순이 산 시기는 정확히 언제일까?
한 세대 평균 재생산 기간을 30년이라고 잡고, 청 태조 누르하치가 태어난 시기인 1559년 2월로부터 6세대 전에 포고리옹순이 태어났 다면, 그해는 1397년 [누르하치 탄생해인 1559년- 180년(6 세대 x 한 세대 30년)=1379년]이 된다. 그해는 포고리옹순이 살던 만주에 공양왕이 만호부를 설치한 해인 1390년에서 불 과 11년 전이고, 조선이 탄생하기 13년 전이다. 또한 <만주실 록> 등에서 누르하치의 6대조라고 하는 ‘조조원황제 두두 멘 터무’가 살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조조원황제 두 두 멘터무’는 <정조실록>에 따르면 그 칭호가 같은 ‘조조원 황제 포고리옹순’이며, 둘은 시기적으로도 같은 때를 살아간 사람이다. 그런데‘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는 또 조선 측 사 서에 “오음회(吾音會) 오도리(吾都里) 만호(萬戶) 맹가첩목 아(猛哥帖木兒)”라고 기록된 인물이다.
결국 세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왜 그런지 이 들 세 인물의 공통점을 정리해보자. 이들의 공통점은 적어도 5 가지나 된다. 첫째, 같은 시대를 살아갔다. 둘째, 모두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 셋째, 동일한 행적을 남겼다. 넷째, 이들 중 적어도 둘은 그 추존호가 ‘조조원황제’로 같다. 다섯째, 가문 의 계보도 같다. 이러한 사실은 포고리옹순·맹가첩목아·두두 멘터무 등 세 인물이 사실은 같은 인물임을 보여준다.
시대, 장소, 행적 일치하는 ‘포고리옹순’과 ‘동맹가첩 목아’ 우선 포고리옹순이 살아간 땅의 위치에 관해서는 지난 1월 호에서 자세히 다뤘다. 포고리옹순은 백두산(白頭山) 천지 (天池, 불후리 오모, 포륵호 못)에서 세 선녀 중 막내인 페쿨 렌(佛庫倫)에게서 태어나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배를 타고 두 만강을 따라 동으로 가서 백두산 동남의 오막혜[오음회(吾音 會), 회령] 지방에 있는 삼성(三姓) 여진 부족의 마을 아타리 (오도리, 알타리)성에 정착하여 만주를 개창하고 살았다. 그 러므로 그의 고향은 우리 땅 백두산과 회령이라는 사실이었 다. 이곳은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백두산 동남 오 음회(吾音會, 회령) 오도리(吾都里) 만호(萬戶) 동맹가첩목아 (童猛哥帖木兒)’가 살아간 지방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만주실록> 등에 기록된 포고리옹순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동맹가첩목아의 행적이 정확히 일 치한다는 사실이다. <청사고> ‘본기 1’ ‘태조본기’ 등 청 사 서에는 “포고리옹순에서 몇 세대를 지나(越數世)” 포고리옹 순의 종족이 그 삼성(三姓) 무리를 제대로 못 다스리자, 무리 가 반란하여 종족이 모두 살해당하고, 어린 아들 범찰(范察) 이 도망하였다고 한다. 청나라 사서는 이 범찰이 누르하치의 6대조인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 곧 ‘맹가첩목아’의 할아 버지 세대라는 취지로 말한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맹가첩 목아의 아비가 다른 아우로 등장하는 범찰(凡察)은 청나라 사서에서는 조조원황제 두두 멘터무의 몇 세대(又數世) 선조 라고 기록된 범찰(范察)과 같은 이름이다.
포고리옹순의 어머니 ‘페쿨렌’은 맹가첩목아의 어머니 ‘야오거’ 그렇다면 ‘세 선녀 이야기’ 설화에서 포고리옹순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막내선녀 페쿨렌(佛庫倫) 역시 역사 속 인물로 찾 아볼 수 있다. 지난 호에서 보았듯 <만주원류고> 등은 청 태 조 누르하치의 전설적 선조 아이신교로 포고리옹순 가문을 ‘금나라의 남은 부락(金遺部)’ 출신이라면서도 그 부모에 관 해 오직 어머니만 ‘막내(季女) 천녀(天女) 페쿨렌’이라고 밝 혔다. 그의 아버지는 붉은 과일을 물고 온 ‘신령스런 까치’로 표현하여, 그의 탄생을 신화화했다. 선녀 ‘페쿨렌’은 누구인가?
범찰이 맹가첩목아의 한 아 버지의 아우가 아님이 명백합니다.” <세종실록>은 맹가첩목아의 어머니 야오거에 관해서뿐 만 아니라, <만주실록> 등 한 계열의 여러 사서에서 한 마리의 ‘신령스러운 까치(神鵲)’로만 표상된 포고리옹순, 곧 맹가첩 목아의 아버지에 관해서도 알려준다. <세종실록> 1439년(세 종 21년) 3월의 기사는 동맹가첩목아의 아버지인 두만 휘후 의 완전한 성씨와 이름을 ‘동휘후(童揮護)’라고 기록했다. 명 황제에게 고하는 식으로 기록된 이 기사는 다음과 같다.
“동 맹가첩목아와 그 아비 동 휘호(童揮護)와 그 아우 범찰 (凡察) 등은 그대로 본국의 공험진 이남 경성(鏡城) 아목하(阿木河) 지방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신의 조부 선신 강헌 왕(康獻王, 곧 이성계-필자주) 때에 맹가첩목아는 우적합(亐 狄哈, 연해주의 우디게이족)에게 가재 등 물건을 침탈당해 그 수하 백성들이 도망가 흩어져 스스로 존립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신의 조부(이성계)께서 불쌍하게 여겨 맹가첩목아에게 경성등처만호(鏡城等處萬戶) 관직을 제수하고 공해(말 우리)를 지어주며 마주 대하여 거리치[牢子] 등 사환하는 인 구와 안마(鞍馬)·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내려주어 위무해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신의 부친 때는 승진시켜 상장군(上將 軍) 3품 관직을 제수해 호적에 붙이게 했…습니다.” 결국 청 황실의 시조 포고리옹순, 달리 맹가첩목아는 고려 중기부터 속속 고려에 귀부하여 고려 백성으로 살던 여진 부 락에서 첨이(僉伊) 벼슬을 한 보가(甫哥)의 딸 야오거(也吾巨) 라는 여인을 어머니로 하고, 이 야오거의 첫 남편인 두만(豆 萬) 벼슬을 한 동휘후(童揮厚)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역사 적 인물이다.
발해왕의 대씨(大氏)로 고려 말을 살아가던 그 후손이 선조 세대에 금(金)나라를 세은 것을 기려 ‘금씨(金氏)’로 성씨를 바꾸고 우리 땅 회령과 경성 등에서 살다 후금, 곧 청나라를 건국했다. 그 후 중원으로 쳐들어가 원래 발해의 ‘말갈(靺鞨, 말고을, 몰골, 馬忽, 馬郡, 고구려의 부속령 ‘말갈칠부’)국’이 라는 말과 같은 소리를 가지는 동음이의(同音異意, 같은 소리 의 다른 뜻낱말)의 국명 ‘맑을(淸, 말갈)국’을 동의이언(同意 異言, 같은 뜻의 다른 말)인 ‘청나라(淸國)’로 개칭한 것이다.
1616년 제2의 ‘금나라(후금)’를 건국한 이래 중국 본토로 쳐 들어가 온 중원을 다스리며 329년간 존속하다 지난 세기 전 반기인 1945년에 망한 청나라-만주국은 곧 ‘우리 민족사’인 것이다!
■전원철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했다.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며, 체첸전쟁 당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하는 등 유엔 전문 기관에서도 일했다.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몽골제국의 기원, 칭기스 칸 선대의 비밀스런 역사> 등 다수의 역사 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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