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그때그일그사람

[임진년 그 사람들]석성, 조선의 영웅이자 중국의 죄인

바람아님 2017. 2. 26. 23:37
아시아경제 2017.02.26 08:00
석성 초상화(사진=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 극복과정에서 조선에 큰 도움을 준 중국의 인물로 만력제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석성(石星)이란 인물이다. 1592년 당시에는 병부상서로 조선 파병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파병에 필요한 시일을 벌고자 심유경을 파견해 일본과의 교섭을 시도하기도 했던 인물로 알려져있다.


조선 입장에서는 크나큰 은인이지만 정작 중국 내에서 평판은 그리 좋진 못하다. 만력제와 마찬가지로 명나라를 임진왜란이란 대대적 원정에 개입시켜 재정파탄의 길로 인도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만력제가 고려천자라고 놀림받았다면 그는 고려중신으로 놀림받았을 정도다.


하지만 그정도 평가를 받을 정도의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1559년에 진사가 되어 벼슬에 발탁된 이후 대단히 강직한 벼슬생활을 이어갔다. 1567년에는 당시 황제인 융경제에게 주색만 즐긴다면서 대신들이 제멋대로 군다고 상소했다가 곤장 60대를 맞고 쫓겨나 평민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석숭의 부인 정씨는 기둥에 부딪혀 죽었다고 한다. 이후 1573년에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사면되고 재등용됐다.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했지만 당시 실세이자 황제의 스승으로 전권을 휘어잡고 있던 장거정과 사이가 나빠 그의 죄를 폭로하고 사직했다. 이후 장거정이 죽고난 뒤인 1587년에 다시 재등용 돼 공부상서, 태자소보 등 주요직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부터 호부상서와 병부상서 등을 역임했다. 항상 바른 말을 하다가 쫓겨나고 다시 등용되는 굴곡진 관료생활을 했던 강직한 인사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는 전쟁이 명나라로 확산되기 이전에 조선을 도와 일본군의 북상을 막아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다행히 파업황제로 악명을 떨쳤던 만력제도 국방 문제만큼은 결코 파업하지 않고 돌봤기 때문에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전쟁 개시 초에는 명나라 조정에 조선과 일본이 서로 짜고 명을 침략 중이라는 헛소문이 돌았다. 이에 그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면서 파병 전까지 시일을 끌고자 일본과의 화의를 진행코자 했다. 이에 일본 정세를 잘 알고 있다고 알려진 심유경에게 유격장군이란 칭호를 주고 조선으로 보내면서 화의를 진행시켰다.


문제는 이 심유경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짜고 동아시아 3국을 동시에 속이는 기상천외한 국제 사기극을 벌이면서 황제의 분노를 샀다는데 있었다. 일자무식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먼저 심유경과 고니시에게 속을 것을 눈치채고 화의를 철폐한 뒤 1597년 2월에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만력제는 크게 분노했다. 심유경을 보냈던 석성은 여기에 함께 휘말려 대국의 체면을 깎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가 1599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중국에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온갖 다양한 민간설화까지 만들어지며 조선을 구해준 고마운 중국 대신으로 기억돼있다. 한 설화에는 석성의 후처가 조선의 역관인 홍순언에게 은혜를 입었기에 이를 갚고자 조선 파병을 소리높여 외쳤다는 내용이 있어 흥미롭다. 석성의 후처는 부모가 병으로 갑자기 죽어 가세가 무너지자 유곽에 팔려갈 신세가 됐는데 이를 홍순언이 불쌍히 여겨 가진 돈 300냥을 탈탈 털어서 그녀의 빚을 갚아주고 부모 장례도 도왔다고 한다. 이후 이 이야기를 들은 석성이 항상 이 은혜를 갚을 날을 기다렸다는 것. 물론 아무런 증거가 없는 설화라 사실여부를 판단할 길은 없다.


그래도 조선조정에서 그에 대한 고마움을 매우 크게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으며 석성의 아들들이 조선으로 망명하자 후하게 대해줬다고 전해진다. 석성의 장남인 석담은 석성이 심유경 스캔들에 휘말려 감옥에 가자 곧 조선에 망명했고 이에 조선조정은 석담을 수양군에 봉했으며 현재 해주 석씨가 바로 석성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석숭의 차남인 석천도 조선으로 망명해 성주로 내려갔으며 현재 성주석씨의 원류가 되었다.


디지털뉴스본부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