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동아일보 2002-07-04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목멱산(木覔山)은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이다. 남쪽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 ‘마뫼’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마뫼’는 마산(馬山) 또는 마시산(馬尸山)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로써 동방 청룡(靑龍), 서방 백호(白虎), 남방 주작(朱雀), 북방 현무(玄武)의 사방신(四方神)을 설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산이 사방을 에워싸야 명당이라는 중국식 풍수지리설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남산을 남쪽 산이라는 의미의 ‘마뫼’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백악산(白岳山·북악산이라고도 함) 아래에 짓자 백악산은 현무인 진산(鎭山·명당의 뒷산)이, 목멱산은 주작인 안산(案山·책상과 같은 산이란 의미로 명당의 앞산)이 된다.
당연히 백악산에서 갈라져서 동쪽을 휘감아 도는 낙산(駱山) 줄기는 청룡이 되고 백악산 서쪽으로 이어져 웅크리듯 솟구친 인왕산은 백호가 된다.
조선 태조는 명당인 한양을 금성철벽(金城鐵壁·쇠로 만든 견고한 성벽)으로 보호하기 위해 이 ‘사방신산’의 산등성이를 따라 석성을 쌓아 둘러놓았다. 한성부(漢城府)라는 명칭은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한양이 명당인 것은 이 사방신산의 생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악산은 진산 답게 북쪽에 우뚝 솟고, 낙산은 청룡같이 동쪽으로 치달리며, 인왕산은 백호처럼 서쪽에 웅크리고, 목멱산은 주작마냥 두 날개를 활짝 펴 남쪽을 가로막는다.
거기에다 북악산과 낙산, 인왕산은 백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산(巖山)인데 목멱산은 흙이 많은 토산(土山)이다. 또 위 세 산이 홑산인데 목멱산만 겹산으로 큰 봉우리 두엇이 동서로 겹치며 이어져 있다.
그래서 한양성 북쪽에서 보면 남산은 동쪽 봉우리가 약간 낮고 서쪽 봉우리가 약간 높아 마치 한일(一)자를 써놓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서예에서 한일자는 마제잠두법(馬蹄蠶頭法)으로 쓰라 한다. 붓을 대는 왼쪽 끝은 말발굽처럼 만들고 붓을 떼는 오른쪽 끝 부분은 누에머리처럼 마무리지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양 북쪽에서 본 목멱산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안산의 생김새로 이보다 더 완벽한 모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큰산은 보는 방향이나 거리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달라진다. 홑산보다도 겹산인 경우는 그 차이가 더욱 크다. 그래서 보는 방향과 거리에 따라서는 실제로는 오른쪽 봉우리가 높은데도 왼쪽 봉우리가 높게 보이는경우도 가끔 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목멱산 모습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한강 하류 양천 현아 쪽, 즉 지금 가양동 쪽에서 보면 목멱산이 이렇게 보인다. 서북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목멱산 동쪽의 낮은 봉우리가 엇갈려 나와 먼저 보이므로 서쪽의 높은 봉우리가 그 뒤로 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철이 되면 아침해가 그 높은 봉우리의 등줄기에서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에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갔으니 그 다음해(1741) 봄에 남산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북악산과 인왕산 쪽에서만 남산을 바라다보고 60평생을 살았던 겸재가 65세에 양천에 부임해와서 남산의 두 봉우리가 서로 뒤바뀌는 현상을 목격하고 어찌 충격을 받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남산에서 해가 떠오를 줄이야!
겸재는 이 그림을 진경시(眞景詩)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쏏川 李秉淵·1671∼1751)의 시 한 수와 서로 맞바꾸었다. 늘 낙산 위에서 떠오르는 해만 바라보고 살았던 겸재는 이런 신기한 사실을 가장 친한 동네 친구인 이병연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도 봄철에 가양동에서 해뜨는 정경을 바라보면 이와 같은 모습이다.
<참고- 이병연의 시>
정선이 양천현의 관아에서 서울 쪽을 바라보며 남산에 해 뜨는 광경을 그린 그림에는
이병연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曙色浮江漢 (서색부강한)
산봉우리들 낚싯배에 가리고 觚稜隱釣參 (고릉은조삼)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朝朝轉危坐 (조조전위좌)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初日上終南 (초일상종남)
새벽빛이 아슴푸레 흐르는 이른 아침, 멀리 남산 위로 떠오르는 아침해가 반쯤 보이고
부지런히 노 저어 가는 낚싯배 뒤로 강 건너편 동네 집들이 잠긴 듯이 보이는
그림 속의 풍경이 시 속에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과 시가 하나로 어우러져 그림이
시고 시가 그림이라 할 만하다
<목멱조돈(木覔朝暾) 큰이미지>
비단에 채색한 23.0×29.4㎝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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