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1. 10. 05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41) 폴 세잔 ‘수욕도'
ㆍ스승을 거쳐, 스승을 넘다
음악도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면서요? ‘부활’의 김태원씨의 말입니다.
찬찬히 김태원씨의 태도를 살펴보면 그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체현하고 있는 진정한 멘토입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진리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스승이란 진리를 파는 장사꾼도 아니고, 진리를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도 아닙니다.
스승은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승은 산파와 같습니다.
‘나’는 스승의 도움으로 내 안의 진리를 발견하고 낳아야 합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김태원씨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여줬던 그 태도! “내가 그대를 키운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스스로 일군 것이다.
나는 다만 그대 곁에 있었을 뿐!” 그대라는 늙은 말이 그에게는 어찌 그리 싱싱한지요.
그는 누구보다도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몸으로 익히고 있는 아름다운 스승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스승들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처럼, 요한의 예수처럼, 그리고 세잔의 피사로처럼! 세잔이, 그림은 상상이 아니라 발견이라
고백할 수 있게 된 건 아무래도 피사로 때문입니다.
1899~1909년, 캔버스에 유채, 208×249㎝, 필라델피아 미술관
세잔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천재는 태어나는 거고, 또 정진하는 구도자처럼 매 순간순간 도달하는 거라는 모순적인 생각이
찾아들지요? 저 그림은 말년의 그림입니다. 당장 봐도 독특하지요?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전체 구도입니다.
그림은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묘한 삼각 구도가 시선을 끕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그림이 현실적이지 않아보였습니다. 여인들의 목욕이라기보다 정령들의 놀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보십시오. 여인들이 하늘이 열리고 강이 흐르는 오렌지빛 대지 위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자연인 양 노는데,
관능적이지도 않고 위험해보이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특별히 시선을 끌려 하는 여인들도 없습니다.
다만 저 여인들은 자연스러운 동작들로 삼각구도에 안정감을 주면서 교묘하게 삼각구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삼각구도는 어쩐지 인위적인 것 같지만, 인위적이란 느낌보다는 꿈결 같다는 느낌이 먼저 옵니다.
저 그림엔 꿈을 꾸는 듯한 매혹이 있습니다. 아마 꿈이라면 건너편 강둑 위에 서있거나 앉아있는 남자의 꿈일 것입니다.
더구나 오렌지빛 강둑과 푸른 하늘, 푸른 강의 대비가 선명함을 넘어 신비하고 시원합니다.
말년의 세잔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는 스승 피사로를 넘어서 지나치고 있지만, 피사로가 없었다면 그리로 갈 수도
없었을 테니 신비한 것이 스승과 제자입니다. 소심하고 예민해서 문득문득 화도 잘 냈던 세잔은 그림 그리는 동네에서도
이상한 사람으로 왕따였던 모양입니다. 그런 그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고, 내면의 눈을 믿게 해주고,
자연을 발견하게 해준 건 따뜻한 피사로였습니다.
세잔이 피사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렇게 자신감 있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세잔이 고백합니다.
“피사로는 내게는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그는 사랑이 충만한 신과 같았습니다.”
실제로 아버지 같은 아버지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독재자 같거나 방관자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같은’ 자는 내가 스스로 ‘나’의 삶의 정원을 가꾸어 갈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 주는 스승입니다.
아직 그런 스승을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때가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승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스승을 만나면 삶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또 스승을 떠나는 그것이 성숙한 삶일 겁니다.
저렇게 원형적인 그림은 세상사가 도통 남의 일인 양 멀어지고 있는 홀가분한 영혼의 그림입니다.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낙타를 타고 훌훌 떠나는 신경림의 ‘낙타’ 같은 영혼 말입니다.
말년에 세잔이 병마와 싸우고 고독과 싸우며 재미없는 구도자처럼 살았어도 세잔의 그림에는 리듬감이 있고 유머가
있습니다. 진짜로 세잔의 영혼은 별과 달과 해와 바람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처럼 살다 갔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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