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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78] 동족에게 쫓기는 사람들

바람아님 2017. 12. 17. 06:55

(조선일보 2017.12.12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지난 2~3개월 동안 KBS의 강규형 이사가 당하는 핍박을 보면서, 한 사람이 다수에게 이런 탈법적인

박해를 당하는데 공권력이 어떠한 보호 조치도 취하지 않고 어떤 당국자도 가해자들에게 자제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이 나라가 국민 보호 의무를 수행할 의지가 있는 나라인가?

KBS 제2 노조원들은 강 이사의 가정과 직장에 몰려가 비방하며 사임을 요구하고, 심지어 강 이사를

수십명이 에워싸고 떠밀기, 조이기 등의 준폭행조차 서슴지 않았다. 강 이사가 재직하는 학교에도

KBS 이사직을 자동 상실하도록 그를 파면 또는 해임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MBC 노조원들까지 학교와 KBS로 찾아가서 강 이사의 사퇴를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소설 '개선문'의 주인공 라빅이 떠올랐다.


강규형 교수. /조선일보 DB


라빅은 유대인 도주를 도왔다는 이유로 나치 비밀경찰에 잡혀가 흉악한 고문을 받는다.

친구들이 그의 눈앞에서 고문으로 얼굴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망가져 죽고 애인은

자살했다. 그는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여권도 몰수당해서 무국적자, 법적인 비(非)인간이 된다.

파리로 피신해서 기술이 부족한 의사들을 대신해 대리 수술을 해 주며 목숨을 이어가지만

그는 언제고 검문에 걸리면 감옥에 가거나 추방당할 처지이다. 즉 그는 디디고 설 땅이 없다.

비록 숨어 사는 처지이지만 자기 친구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애인을 자살에 이르게 한

게슈타포 요원 하케를 찾아내 복수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긴다. 그는 요행히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검문에 걸려서 집단수용소행 트럭에 실린다.

라빅은 외국에서 의술로 거의 매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면서도 자기 나라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쫓길 수밖에 없고, 강규형 교수는 공영방송의 발전을 위해 성의를 다하고도

자국 안에서 비국민처럼 쫓기는 처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영흥도 낚싯배 사고 희생자들을 위해서 청와대 비서관들과 함께 한 번, 각료들과 함께 또 한 번,

묵념하면서 그런 사고는 모두 국가 책임이라고 말했다.

가해자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에도 국가의 책임을 통감하는 정부가 국민의 인권이 무도하게 짓밟히는 상황은

어째서 외면하는가. 공영방송이 폭압으로 '정상화'를 이루면 과연 '정상적'인 방송을 할 수 있을까? 



개선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송영택/
문예출판사/ 2014/ 622 p.
808-ㅁ7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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