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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麗水漫漫]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바람아님 2017. 12. 17. 08:16

(조선일보 2017.12.06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인터넷 공간서 스타 만들고 끌어내리는 '가학 놀이' 확산에
연예인들 '공황 장애' 고백하며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호소
'소셜 미디어 문명화'로 감정 과잉과 폭력을 통제하게 될 것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사방에서 연예인들이 고백한다.

공황장애가 정식(?)으로 정신병리학 용어가 된 것은 1994년에 나온 미국정신의학회의 DSM-IV부터다.

DSM은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즉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의

약자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과 보험 회사, 그리고 제약 회사들이 환자 치료비의 지불 주체를 명확히

하고자 1952년에 처음 만들었다. 내용도 자주 개정한다. '공황장애'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언젠가부터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신 질환이라는 이야기다(이 이야기는 몹시 길고 논쟁적이기에 그냥 건너뛴다).


느닷없이 유행하기 시작한 '나도 괴롭다'는 연예인들의 '고통 내러티브'의 한국적 생성 맥락은 도대체 어떤 걸까?

인터넷이 나오기 이전 인기 연예인은 '스타'였다. 말 그대로 손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의 '별'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 '별'들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가상공간'에 잡아넣었다.

이제 대중은 갇혀 있는 스타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만든 스타의 추락을 지켜보는 것은 가장 스펙터클한 '놀이'가 되었다.

스스로 추락하지 않으면 추락시킨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던 단역 연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스타가 된다.

눈물로 고백하는 '깜짝 스타'의 과거 이야기에 대중은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며 함께 기뻐한다.

그들의 힘들었던 무명 시절과 자신의 현재 상황을 비교하며 위로까지 받는다. 그러나 '좋은 관계'는 여기까지다.

모든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빠뜨리기'는 시작된다.

'음주 운전' '갑질'과 같은 허튼 모습이라도 보이면 바로 끝이다.

출연이 예정된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 금지를 요구하는 '청원 운동'이 벌어진다.

그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의 불매운동도 벌어진다.


오늘날 스타가 되려면 팬들의 폭력적 '가학 놀이'의 희생양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연예인들의 느닷없는 '고통 내러티브'는 바로 이런 대중의 '감정 폭력'에 대한 '항복 선언'이다.

'나도 정말 힘들게 먹고살고 있으니 제발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호소다.

해당 연예인들의 '공황장애'가 '꾀병'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 느닷없이 '공황장애'를 내놓고 고백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신장애'는 모두가 숨기려고 했던 치명적 약점이었다.


‘감정혁명시대의 모나리자’.‘감정혁명시대의 모나리자’. /그림 김정운


인터넷 공간에서 권력을 확인한 대중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몰려다닌다.

대상은 이제 연예인에서 정치인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소셜미디어로 스타가 된 정치인들이 '공황장애'를 고백할 날도 그리 머지않았다.

일반인들도 화제가 되는 순간 바로 '털린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 순위는 그들에겐 잘 차려진 식탁이다.

물론 '감정 폭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동도 넘쳐난다.

눈물 흐르는 미담도 수시로 올라온다.

그러나 '과잉 감동'이다. 바로 피곤해진다.

사람들은 더욱 강력한 정서적 자극을 찾아 우르르 몰려다닌다.

온라인,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 감정의 '스펙터클 사회(Spectacle society)'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문화는 감정 규칙이다.

타 문화권에서 겪는 '컬처 쇼크'의 대부분은 바로 이 감정 규칙의 충돌이다.

화를 감정과 연결해 처음 설명한 이는 독일의 문화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다.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Zivilisationsprozeß)'이란 '감정의 온순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중세 사회는 폭력이 당연했다. 땅을 지키기 위한 폭력, 분노의 표출은 중세 사회 유지의 매개체였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절대 권력이 나오면서부터 원초적 감정 표출은 더 이상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감정 표현은 각종 의식과 예절을 통해 통제되었다.

서구 궁정 사회를 특징짓는 귀족들의 세련된 몸가짐, 가식적 제스처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절대왕정이 끝나고 시민사회가 급성장했다.

자본주의와 시민사회가 결합하면서부터 외부로부터 강요되던 감정 규칙은 각 개인의 책임 영역으로 옮아 왔다.

근대적 개인은 '타자 강제'가 아니라 '자기 강제'에 따른 자신의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는 미숙하고 유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감정의 온순화 과정'을 엘리아스는 '심리화(Psychologisierung)' 과정으로도 표현한다.

문명화 과정이란 감정 규칙의 생성과 내면화 과정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모두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한다. 앞으로 인간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겁을 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감정'의 문화적 변동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다.

감정에 대해 도무지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다. 거참, 감정이야말로 삶의 본질인데….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 날것의 '감정 폭력' 흥미로운 것이다.

전혀 낯선 형태의 '감정 혁명'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소셜미디어의 규칙 없는 감정 과잉과 감정 폭력이 지속되면

어떤 형태로든 '감정의 문명화 과정'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감정의 근대적 자기 강제가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되었다면,

가상공간과 현실 공간이 융합되는 21세기의 '감정 혁명'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대단한 나라'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