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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42) 번 존스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

바람아님 2017. 12. 20. 10:23

(경향신문 2011. 10. 12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42) 번 존스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


ㆍ황금보다 귀한 꽃

 
스티브 잡스의 매력은 돈이 아니지요? 편리한 컴퓨터 세상도 아니고, 끝없는 혁신도 아닙니다.

그의 매력은 직관입니다.

그는 직관을 따라 산 자, 직관이 살아있는 자였습니다.

나는 잡스를 돈이 덫이 되지 않은 경영자로, IT업계 황제라는 왕관이 덫이 되지 않은 인간으로 기억합니다.


저 그림은 화려한 왕관을 내려놓는 자의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그림은 낭만적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초라한 거지소녀를 사랑해서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왕관을 내려놓고 있는 왕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지금 사랑 앞에서 쩔쩔매는 저 왕은 원래 여인에게 관심이 없었다지요?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남자,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또 얼마나 삭막하게 살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삭막한지도 모른 채 황금빛 왕관에 취해.

그런데 그 왕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워줄 여인이 하필 거지소녀일까요? 


번 존스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 1880~84년, 캔버스에 유채,

290×13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클릭시 큰이미지 가능)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거지이니 왕관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안되겠습니다.

차라리 왕관을 내려놓아야 할 판이지요. 저런 상황이라면 왕으로 사는 것은

괴롭고, 왕관을 내려놓은 것은 외롭겠습니다.


저 왕은 기꺼이 왕관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왕은 지금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왕에게 소녀는 영혼이고 빛이고, 직관입니다.

왕이 사랑하는 저 여인을 보십시오. 손에 아름다운 꽃을 들고 있는 소녀는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왕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유혹을 모르는 소녀 같습니다.

그러나 몸동작과 얼굴표정으로 봐서 소녀는 분명 사랑의 꿈으로 긴장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왕관을 내려놓고 소녀의 손을 잡을 것 같은 왕으로 인해

여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무릎 위에 왕관을 내려놓고 소녀를 바라보는 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껏 누리고 모은 것을 버리는 데서 오는 고뇌를 기꺼이 감당하고

그 고뇌 속에서 새로운 길을 보고 있는 왕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원래 사랑이란 게 그런 게 아닌가요?
계급장을 떼고 자기를 바라보게 하는 힘!

여자는 계급장을 떼지 못하는 남자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당당한 여인이 어찌, 왕관 뒤에 숨어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겠습니까. 계급으로 정략결혼은 할 수

있어도 깊은 사랑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왕관을 써보셨습니까, 왕관을 즐겨 보셨습니까?

꼭 정치권력만이 왕관인 것은 아닐 겁니다.

왕관이란 인생을 빛나게 하는 내 인생의 자랑거리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저 그림은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그 뒤에 숨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되기 힘든 ‘나’에게 묻습니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왕관이 어쩌면 너의 덫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나’는 별 거 아닌 것을 왕관인 양 붙들고 고뇌하는 왕 같고,

우리 앞에 저 아름다운 소녀는 그동안 보살피지 못해 거지처럼 버려졌던 내 마음의 직관은 아닐까요?

가끔 주변에서 보았습니다. 많이 가진 자가 가진 것을 지키느라 가진 것이 덫이 되는 상황을. 돈을 너무 믿어 돈을 쫓다가,

서푼도 되지 않은 권력을 왕관인 줄 알고 붙들고 거들먹거리다가 진정한 것을 거지 취급하는 것을.


나는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왕관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왕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스스로 초라해지는 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왕관을 내려놓은 자리, 거기를 생명의 꽃을 든 소녀가 채울 테니까요.

아네모네를 쥐고 있는 소녀야말로 왕관에 집착한 내 자신이 잃어버리고 있었던 직관이 아닐까요? 


잡스의 매력이 그대로 드러났던 스탠퍼드대 연설엔

죽음이라는 절체절명 앞에서도 생명의 꽃, 직관의 깨달음을 얻었던 인간 중의 인간이 보였습니다.

“모든 외형적인 기대들, 자부심, 실패의 두려움,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인생에서 큰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가 얻은 지혜는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가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지 않게 하라. 마음을 따라가고, 직관을 따라가라!” 


저 소녀는 ‘나’의 직관입니다. 직관이 말합니다.

왕관을 바라보고 살지 말라, 남을 바라보고 살지 말라, 오로지 ‘나’를 바라보고 살아라. 직관을 따라가라!
          



[명화 속 여성] 번 존스 -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    << 전설 >>

거지소녀와 사랑에 빠진 王, 나라를 버리고 사랑을 택했다


(세계일보 2009-03-26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 함께 라파엘 전파를 이끈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낭만주의 화가 번 존스.

중세문학과 미술에 심취해 상징성 있는 신비스러운 작품들을 다수 남겼다.

잘 통제된 색채와 유려한 소묘를 통해 우수에 잠긴 아름다운 여인을 표현하는 데 능란한 솜씨를 보였다.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무표정한 인물들은 번 존스 작품의 단골 주인공들이다.


‘코페투아 왕과 거지소녀’는 평생 여성에 대한 관심이 없던 왕이 어느 날 우연히 거지소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담은 영국 전래 민요를 토대로 그려진 것이다. 민요에 따르면, 왕은 평소 국정을 돌보느라 이성에겐 전혀 관심이 없던,

군주로 치자면 성군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거리를 지나던 어여쁜 소녀를 보는 순간 사랑의 마법에 빠지고 말았다.

이미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 왕에겐 그녀의 신분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왕이 거지소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궁전은 발칵 뒤집혔고, 왕은 거지소녀와 왕좌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성군이었던 코페투아 왕은 결국 나라 대신 사랑을 택했다.


번 존스는 이 유미적(唯美的) 주제를 그만의 방법을 통해 화폭에 재해석해 냈다.

그림의 중앙에는 한 손에 꽃을 든 청순한 모습의 거지소녀가 앉아 있다.

차림은 남루하지만 우아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하다.

갑옷으로 무장한 왕은 그 아래 앉아 소녀를 응시하고 있다.

화려한 왕관은 무릎에 힘 없이 내려놓았는데, 사랑하는 소녀에 대한 경의의 표현인 동시에 앞으로 그가 버리게 될

왕좌를 중의적으로 상징한다.

왕좌의 바로 위, 소녀에게 바쳐진 꽃은 아네모네로, 꽃말은 ‘사랑의 괴로움’이다.


화가는 연인들의 우수에 잠긴 표정과 아네모네 꽃을 통해 어느 정도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한 모양이나,

두 사람의 인연의 귀결이 어땠는지는 민요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당시 대중들은 순수했던 왕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길 원했던 것이 아닐까.


수세기가 흐른 지금, 1년 중 가장 로맨틱한 시즌이 이제 막 지났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모두 이제 한국에서는 국경일만큼이나 유명한 전 국민적 축제가 됐다.

이 날을 빌어 좋아하는 이에게 애정을 표시하여도 누가 되지 않는다 하니, 숫기가 없는 젊은이들에겐 안성맞춤인 깜찍한 축제다. 
 
상술이라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있지만, 해마다 밸런타인데이 시즌이면 거리는 초콜릿과 캔디로 넘쳐난다.

사랑에 빠져 있건 아니건 너도나도 달콤한 사랑의 기운에 젖어들어 로맨틱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는 사랑에 대해 곧 있으면 식어질 감정일 뿐이라 푸념할 수도, 달콤함 뒤에 숨겨진

상처의 쓰라림은 어쩔 것이냐며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랑의 결과란 겪어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 아니었던가. 코페투아 왕이 거지소녀를 향해 왕좌를 내버렸듯, 순수한 사랑의 열정은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로맨틱한 기운을 불어넣어 줄 시기적 바람이 잦아 들었지만, 아직 수줍은 마음을 전하지 못한 이가

있다면,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고백해보자.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레 상대와 함께 또 다른 아름다운 동화가 만들어질 테니.

그대에게 새로운 사랑의 기운이 듬뿍 충전되길 바란다.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경향신문(2011.1.02 ~ 2011.12.21)


< 명화를 철학적 시선으로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


(1) 반 에이크 ‘수태고지(경향신문 2011.01.02) 

(2) 클림트의 ‘다나에(2011.01.09)

(3)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아프로디테'(2011.01.16)

(4) 샤갈의 ‘거울’(1915)(011.01.23)

(5) 안토니오 카노바의 '에로스와 푸시케'(2011.01.30)


(6) 루벤스 '잠든 에로스를 지켜보는 푸시케'(2011.02.06 20)

(7)수잔 발라동 '아담과 이브'(2011.02.13)

(8)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2011.02.20)

(9) 루벤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2011.02.27)

(10) 엘리후 베더의 ‘스핑크스의 질문자'(2011.03.06)


(11) 폴 고갱 ‘신의 아이'(2011. 03. 13)

(12) 고흐 ‘슬픔'(2011. 03. 20)

(13)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2011. 03. 27)

(14) 밀레의 만종(2011. 04. 03)

(15) 조지 클라우센 '들판의 작은 꽃'(2011. 04. 10)


(16)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짐(2011. 04. 17)

(17)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2011. 04. 24)

(18)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2011. 05. 01)

(19)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2011. 05. 08)

(20)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2011. 05. 15)


(21) 워터하우스의 아리아드네(2011. 05. 22)

(22) 티치아노의 ‘유디트’(2011. 05. 29 )

(23)이 시대의 오르페우스, 임재범(2011. 06. 05)

(24) 모로의 ‘환영’(2011. 06. 12)

(25)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2011. 06. 19)


(26)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는 카미유’(2011. 06. 26)

(28) 조르주 로슈그로스의 ‘꽃밭의 기사’(2011. 07. 03)

(29)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2011. 07. 10)

(30) 고흐의 ‘해바라기’(2011. 07. 17 18:10)


(31) 모네의 수련 연못 (2011. 07. 24)

(32) 르누아르의 ‘빨래하는 여인들’ (2011. 07. 31)

(34)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2011. 08. 10)

(35) 오처드슨의 ‘아기도련님’  (2011. 08. 17 )


(36) 렘브란트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  (2011. 08. 24 )

(36) 마티스의 ‘원무’ (2011. 09. 07)

(38) 앙리루소 ‘뱀을 부리는 여자’ (2011. 09. 14 21:17)

(39) 앙리 루소 ‘잠든 집시여인  (2011. 09. 21)

(40)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2011. 09. 28)


(41) 폴 세잔 ‘수욕도’  (2011. 10. 05)

(42) 번 존스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  (2011. 10. 12)


(43) 쿠르베 ‘상처 입은 남자’(2011. 10. 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0191946195


(44)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2011. 10. 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0262142355


(45) 밀레의 ‘접붙이는 사람’(2011. 11. 0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1021842215


(46) 뭉크의 ‘절규’(2011. 11. 09 21: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1092103325


(47) 조지 프레더릭 왓츠의 ‘희망’(2011. 11. 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1162051265


(48) 샤갈의 ‘떨기나무 앞의 모세’(2011. 11. 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1302103105


(49) 고갱의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2011. 12. 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1112072102435


(50)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2011.12.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2212057135&code=9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