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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자료로만 활용한다면, 누가 기록을 남기겠는가

바람아님 2017. 12. 23. 12:05

(조선일보 2017.12.22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시덕의 종횡무진 인문학]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전 5권)
저자 손정목|한울 |2017.05.15


늘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한국인은 책의 민족인가?"

500여년간 지속된 조선 정부가 남긴 국가 차원의 기록의 양은 같은 시기 미국·일본·중국 등

주요 국가들의 기록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많은 양이 아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이 단일한 기록물을 수백년에 걸쳐서 작성한 것은

인상적인 업적이기는 하다. 다만 정부의 기록이 곧 국민 전체의 기록은 아니다.

조선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상민과 노비들이 남긴 기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 미미함에 충격을 받을 정도다.


장기간에 걸쳐 기록을 남기려 한 조선 정부의 원칙은 그나마 현대 한국으로 계승되지도 못했다.

뜻이 있어서 많은 기록을 남긴 정권이나 공인이 그 기록이 빌미가 돼서 고초를 겪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현대 한국에서 이렇게 기록 남기지 않는 풍조가 생긴 데 대해 고(故) 손정목 선생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刊·전 5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971년 서울의 대연각 화재 때 당국은 기록상 이 호텔 건설에 관계되었음이 확인된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 뒤로 사람들은 훗날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아예 기록을 남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고가 났을 때 관련 기록을 찾는 것은 또다시 사고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데, 현대 한국에서는

누군가를 본보기로 처벌하기 위해 관련 기록을 찾으니 그 누가 기록을 남기겠는가?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또 1970~80년대에 폐지 수집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이 파기되거나 군고구마 봉투로 재활용되었다.

물론 가난한 나라에서 종이 만들 펄프를 수입할 돈을 아끼자는 목적은 십분 이해되지만, 펄프 살 돈을

아끼기 위해 현대 한국이 70여년의 역사를 폐기해버렸다는 사실은 똑똑히 기억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미미했지만 현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양적·질적 성장을 이룩한 대도시 서울의 가까운

과거를 증언해줄 공적인 기록들은 이렇게 대량으로 파괴됐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서울의 탄생과

성장을 일선에서 담당하고 목격한 손정목의 이 책은 그 어떤 정부 기록물이나 고관대작의 회고록보다도 소중한 유일무이의

'서울 창세기'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손정목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다.

'여생을 보내는 데는 훨씬 수월한 방법도 있었을 텐데 굳이 그렇게 어려운 나날을 보낸 것은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부귀영화나 편안한 노후 대신에 항상 시간에 쫓기면서

자료를 뒤지고 글을 쓰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을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손정목 같은 이가 있기에 필자는 한국인이 책의 민족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