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조 어진(御眞). 정조는 은애와 신여척을 풀어줌으로써 조선의 관료 체제에 경종을 울렸다. |
조선 정조(正祖) 때 전라도 강진에 은애(銀愛)라는 여자가 살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아리땁고 참했다. 이 동네에는 안씨 성을 가진 늙고 억센 할미가 살고 있었는데, 젊은 시절 기생이었다는 이 할미는 생긴 것도 추악했지만 성격이 고약스러웠다. 음흉하고 언행이 거칠고 툭 하면 거짓말을 해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절레거렸다.
이 할미는 옴과 부스럼이 가득했는데 때때로 가려움을 이기지 못할 정도가 되면 미친 듯이 발작하며 욕을 함부로 해댔다. 거칠고 억센 이 할미를 동네에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외면하고 피했다. 아무튼 이 할미가 종종 은애네 집에 와서 은애 어머니에게 쌀, 콩, 소금, 메주 등을 빌려 갔다.
은애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따돌리는 할미지만 불쌍한 마음에 도와주었다. 그러나 살림이 넉넉지 않아 간혹 주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 할미는 그걸 고깝게 생각해 원한을 품었다. 사실 원한을 품을 일이 아니었지만, 속 좁고 삐뚤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할미는 그간 잘 대해주던 건 생각지 않고 서운한 것만 맘속에 쌓았다.
쌓은 감정의 똬리가 느닷없이 터져 나왔다. 할미가 흉계를 꾸몄다. 자기 시누이의 손자인 최정련(崔正連)이란 놈을 꾀어 은애와 결혼하고 싶지 않냐고 부추겼다.
“결혼하려면 말이다, 은애와 네가 이미 정을 통했다고 소문을 내야 한다. 알겠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은애의 몸을 머릿속에 상상해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몸살이 날 정도로 후끈 달아오른 이 멍청한 놈은 흉측한 할미의 말대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18세 어린 여성의 살인
할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제 영감에게도 흉계를 부렸다.
“글쎄 은애가 우리 정련이를 좋아해서 나보고 중매를 서달라지 뭐예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니 글쎄 그만 다른 사람에게 들통이 나자 은애가 담장을 넘어 도망쳤어요.”
정말이지 황당한 소리였다. 그러나 추문이란 미담보다 훨씬 더 빨리 퍼지는 법이다. 소문이 동네방네 퍼지며 왁자지껄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은애는 음란하고 저속한 ‘쌍년’이 되어 버렸다. 이젠 시집가는 것은 물론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어렵게 되어 버렸다. 억울함을 토로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은애는 참는다. 그저 꾹 참는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 해도 선한 이는 있는 법이다. 이 마을에 김양준(金養俊)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은애에 대한 소문이 명백하게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은애와 결혼을 했다. 은애는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가정을 꾸렸다. 하늘이 도운 거였다.
그런데 이 끔찍한 할미가 패악을 부렸다. 거짓말의 도가 이젠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에 정련이와 중매를 서면 내 약값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은애 년이 배반하고 딴 놈에게 시집가 버렸다. 그래서 정련이가 약값을 주지 않아 내 병이 더 깊어졌다. 이 은애 년은 정말 내 철천지원수다.”
이쯤 되면 미친 거나 다름없다. 동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돌아보며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바른말을 꺼내진 못했다. 광패한 할미의 욕설을 피해 외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제 일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은애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2년을 참고 지냈다. 그러는 동안 할미의 패악은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은애는 결단을 내렸다. 목숨을 걸고 명예를 지키기로 맘먹는다. 그래서 할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부엌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이때 은애의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살인의 이유
이 할미는 옴과 부스럼이 가득했는데 때때로 가려움을 이기지 못할 정도가 되면 미친 듯이 발작하며 욕을 함부로 해댔다. 거칠고 억센 이 할미를 동네에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외면하고 피했다. 아무튼 이 할미가 종종 은애네 집에 와서 은애 어머니에게 쌀, 콩, 소금, 메주 등을 빌려 갔다.
은애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따돌리는 할미지만 불쌍한 마음에 도와주었다. 그러나 살림이 넉넉지 않아 간혹 주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 할미는 그걸 고깝게 생각해 원한을 품었다. 사실 원한을 품을 일이 아니었지만, 속 좁고 삐뚤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할미는 그간 잘 대해주던 건 생각지 않고 서운한 것만 맘속에 쌓았다.
쌓은 감정의 똬리가 느닷없이 터져 나왔다. 할미가 흉계를 꾸몄다. 자기 시누이의 손자인 최정련(崔正連)이란 놈을 꾀어 은애와 결혼하고 싶지 않냐고 부추겼다.
“결혼하려면 말이다, 은애와 네가 이미 정을 통했다고 소문을 내야 한다. 알겠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은애의 몸을 머릿속에 상상해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몸살이 날 정도로 후끈 달아오른 이 멍청한 놈은 흉측한 할미의 말대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18세 어린 여성의 살인
할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제 영감에게도 흉계를 부렸다.
“글쎄 은애가 우리 정련이를 좋아해서 나보고 중매를 서달라지 뭐예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니 글쎄 그만 다른 사람에게 들통이 나자 은애가 담장을 넘어 도망쳤어요.”
정말이지 황당한 소리였다. 그러나 추문이란 미담보다 훨씬 더 빨리 퍼지는 법이다. 소문이 동네방네 퍼지며 왁자지껄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은애는 음란하고 저속한 ‘쌍년’이 되어 버렸다. 이젠 시집가는 것은 물론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어렵게 되어 버렸다. 억울함을 토로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은애는 참는다. 그저 꾹 참는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 해도 선한 이는 있는 법이다. 이 마을에 김양준(金養俊)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은애에 대한 소문이 명백하게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은애와 결혼을 했다. 은애는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가정을 꾸렸다. 하늘이 도운 거였다.
그런데 이 끔찍한 할미가 패악을 부렸다. 거짓말의 도가 이젠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에 정련이와 중매를 서면 내 약값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은애 년이 배반하고 딴 놈에게 시집가 버렸다. 그래서 정련이가 약값을 주지 않아 내 병이 더 깊어졌다. 이 은애 년은 정말 내 철천지원수다.”
이쯤 되면 미친 거나 다름없다. 동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돌아보며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바른말을 꺼내진 못했다. 광패한 할미의 욕설을 피해 외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제 일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은애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2년을 참고 지냈다. 그러는 동안 할미의 패악은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은애는 결단을 내렸다. 목숨을 걸고 명예를 지키기로 맘먹는다. 그래서 할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부엌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이때 은애의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살인의 이유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 안씨 노파는 은애에 대해 온갖 추문을 퍼뜨렸다. |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절대 옳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살인이란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도 아니다. 은애의 살인을 찬찬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 그녀가 모함을 받자마자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할미의 패악질 이후 꽤 한참 후에 살인을 했다는 것 말이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사실 이것이 후일 정조 임금을 괴롭히는 문제가 된다.
아무튼 은애는 할미가 어린 처녀가 헤프다는 둥, 남자를 꾀어 밀회를 하려 했다는 둥 온갖 거짓말로 모함하는 동안은 꾹 참았다. 추잡하고 시끄러운 소문이 났지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하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정말 시집은 생각도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도 은애는 참았다. 할미를 만나 원한을 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만 참으면 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불이익이라면 더러운 소리를 들어 사람들이 손가락질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시집을 못 가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바깥일을 하기 어려운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결혼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냥 늙어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은애는 참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자 할미가 더 날뛰었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소문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은애는 더 이상 참기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문제, 사회 문제로 커졌기 때문이다. 자기만 참으면 되는 일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선량하게 자신을 믿어준 남편과 시댁에 큰 누를 끼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은애가 원래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로 약속해 놓고 지금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는 모함은 은애가 음탕하고 부도덕하다는 말을 넘어, 그렇게 음탕한 년을 얻은 남편과 그 집안 꼴도 알 만하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는 혼인하기로 약속하면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요 윤리였다.
심지어 정혼(定婚)하고 남편 될 사람이 죽는 경우가 발생해도 그대로 시집가서 평생 혼자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시대에 할미의 모함은 은애와 남편, 그 집안에 치명적이었다. 더 이상 할미의 패악에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래요 우리 집은 인륜을 저버린 몹쓸 종자예요”라고 시인하는 꼴이 되는 거였다.
나서지 못하는 것이 더 수치
결과적으로 할미를 죽이고 은애가 잡혔기에 살인이 쉬웠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은애의 살인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은애는 어리고 약했고 할미는 거칠고 억셌다. 둘이 맞부딪쳐 싸운다면 은애가 이길 게 아니라 할미가 손쉽게 제압할 상황이었다. 할미가 그토록 패악을 부려도 동네 사람들이 누구 하나 뭐라 나서지 못했던 것도 할미가 보통 드센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혀 온 은애를 보고 사또가 이렇게 다그쳤던 거다.
“할미는 억세고 너는 야리야리한데, 지금 시체에 난 칼자국을 보니 도무지 말이 안 된다. 너 혼자 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 공범이 있지? 바른대로 말해라!”
살인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차이가 현저했던 거다. 사실 잡혀 온 은애의 모습을 보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목에 칼을 쓰고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다리엔 족쇄까지 채워져 있었는데 약한 몸이 기운 없이 축 늘어져 형구를 제대로 지탱하지도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은애는 분명했다.
“아닙니다. 제가 살인자입니다.”
아무리 은애가 단독범이라고 말해도 사또는 믿을 수 없었다. 사또는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다.
사실 은애는 살인할 맘을 품었지만 자신이 성공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할미를 만만히 여겨 간 것이 아니라, 따지러 가면 할미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단 걸 알고도 갔다. 조금 후에 신여척 사건을 들으면 느끼겠지만, 조선시대 민간에서 서로 싸우다가 죽는 일이나 폭력은 꽤 빈번했다. 은애는 억센 할미에게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단 생각을 하고도 갔다. 다시 말해, 할미를 죽일 수 있단 확신에서 간 것이 아니라 제 목숨을 걸고 간 거였다.
은애가 도저히 할미의 상대가 아니었다는 건 부엌칼을 들고 나타난 은애를 보고 할미가 비웃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할미는 칼을 든 은애를 보고도 비웃었다.
“찌르려고? 그래 어디 한번 찔러 봐!”
결과적으로 할미는 은애를 얕잡아 본 것 때문에 죽었다. 하지만 할미가 얕잡아 볼 정도로 은애는 약하고 가냘팠다. 그래도 은애는 나섰던 것이다. 그냥 참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서지 못하는 것이 더 부끄럽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정조의 현명한(?) 판결
어떻든 살인은 큰 죄였다. 사또는 해결할 수 없었다. 상급 기관인 관찰사에게로 올렸다. 관찰사 역시 쉽게 판결할 사안이 아니었다. 공범이 있느냐고 엄하게 추궁하기를 9번이나 반복할 뿐이었다. 목에 칼을 차고 족쇄에 붙들려 꼼짝도 못하는 은애는 축 늘어져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규중(閨中)의 처녀를 모함해서 더럽게 하는 것은 천하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결혼했는데도 그치지 않고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회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입니다.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지만, 사람을 죽이면 관가에 잡혀가 저 자신도 죽을 거란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찌 공범이 있어서 도움을 청했겠습니까.”
관찰사는 은애가 불쌍했다. 그동안 감옥에서 계속 고생하며 심문과 문초를 받은 것만 생각해도 죗값으로는 충분했다.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판결을 뒤로 미루며 시간이 끌었다.
1790년 여름, 정조 임금의 아들이 태어나는 경사가 있었다. 보통 이런 좋은 일에는 사형수를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다. 이때를 타서 관찰사가 은애의 사건을 정조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형조에서 이 사건을 꼼꼼히 논의하라 지시한다.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결국 의견이 모였다.
“은애가 지극한 원한을 갚은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것은 정상참작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대신들의 공론을 막으며 정조가 나섰다.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본분인 여자가 음란하다는 모함을 당했다. 그것은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천하에 가장 원통한 일이다. 보통 정절(貞節)을 지키려는 여자들이 택하는 가장 쉬운 것은 자살이다. 그것으로 자신은 결백하다고, 모함이 원통하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애는 그런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부엌칼을 들고 원수를 죽여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자신은 흠이 없다는 것을 알렸다. 그렇게 세상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려 사회 기강을 일깨우고 바른 풍속을 세웠다. 옛날이라면 표창을 하며 칭찬할 일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판결한다.
“그동안 감옥에 갇혀 고생한 것으로 죗값은 다 되었다. 목숨은 살려주도록 해라.”
정조의 판단은 현명했다. 은애는 다른 여자들처럼 소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와 부딪쳤던 것이다. 도저히 힘으로는 이기지도 못할 할미에게 목숨을 걸고 덤볐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억울함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과 그 집안, 나아가 사회윤리와 기강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정조는 은애의 사건을 이야기로 적어 널리 알리라고 지시했다.
정조의 판결은 간단했다. 법대로 하자면 살인죄는 중형에 해당하나 사회예속에 따르면 용서받을 만하다는 거였다. 즉 정조는 ‘법(法)과 예교(禮敎)’ 중에서 예교를 택했던 것이다. 《예기(禮記)》에 따른, 상층 양반들은 예(禮)로 다스리고 하층 백성들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에서, 아래의 백성들도 예로 다스리려 한 것이다. 정말 성군(聖君)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런 생각뿐이었을까? 단지 백성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부였을까?
신여척 사건
은애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나오지만 정황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우리가 제대로 은애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은애전(銀愛傳)》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애전》이 실린 이덕무의 《아정유고(雅亭遺稿)》를 보면, “경술년(1790) 6월 임금께서 옥안(獄案)을 심리하시다가 김은애(金銀愛)와 신여척(申汝倜)을 살리게 하시고, 나에게 명령하시어 《은애전》을 짓게 하셨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러니까 은애 말고도 신여척이란 자도 정조가 같은 의도로 살려주었단 것이다. 그렇다면 신여척 사건을 살펴보면 정조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여척은 전라도 장흥 사람인데, 이웃에 김순창(金順昌), 김순남(金順南)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 김순창이 아내와 함께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다. 아내가 집에 있던 보리가 줄어들었다는 소리를 했다. 그 말에 형 순창은 동생 순남이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순창은 우악스러웠다. 바른대로 말하라며 윽박지르는 형의 서슬에 동생은 억울하다며 눈물만 흘렸다. 본래 성질이 난폭하고 무지막지했던 형 순창은 동생의 머리를 절굿공이로 내리쳐 거의 죽게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 순창을 말리자,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난리를 피워댔다. 이런 황당한 소리를 들은 옆집의 신여척이 달려와 미친 듯이 날뛰는 순창의 상투를 틀어쥐었다.
“절굿공이로 동생을 때리다니, 너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이런 못된 놈 같으니라고.”
갑자기 나타나 꾸지람을 하는 신여척에게 순창은 화가 났다.
“내가 내 아우를 때리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러며 신여척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신여척이 의리로 타이르는데도 듣지 않고 발길질을 하니 나도 발길질을 하겠다며 순창을 냅다 차버렸다. 그런데 그게 탈이 났다. 복부를 강타당한 김순창이 그대로 고꾸라져 비슬비슬 거리다가, 이튿날 결국 죽어 버렸다.
사람들은 쉬쉬하며 덮어두려 했지만 결국 알려져 신여척이 옥에 갇혔다. 그가 살인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사람을 죽인 거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미필적 고의(未畢的 故意)’였다.
이에 대한 정조의 판결은 은애의 경우와 같았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애가 없는 자의 죄를 다스린 것은 기개가 있는 행동이라며, 그를 풀어주라고 한 것이다.
정조의 고민
신여척 사건을 보면, 정조의 고민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법과 예교에서 예교를 택한 것처럼 보이나, 기실은 법을 택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사실 동생을 절굿공이로 쳐서 죽이려고 난동을 부리는 형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충분히 둘러싼 정황이 짐작된다.
만약 조폭들이 눈을 부라리며 동네방네 다니고 여기저기 을러대며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느닷없는 폭력을 벌건 대낮에 벌이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이 마을 저 거리에 ‘깡패’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그 시절이 행복한 시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행패, 패악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대체 포졸들은 어디 있는 거야?’
바로 그렇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본질이었다.
물론 동생을 때려죽이려고 한 형은 깡패는 아니었고, 또 동네 사람들을 때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패악질을 마음 놓고(?) 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의 사회 풍속은 한심한 상황이었다. 나라가 과연 제대로 다스려지고 있는 것일까? 신여척이 한 일은 그때, 사또도 포졸도 나서지 않은 그때, 멀리 있는지 아직 듣지도 못했는지 아무튼 공권력이란 것이 눈앞에 없던 그때, 분연히 나서서 폭력을 멈추게 하고 일을 매듭지으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포졸도 관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감옥에 갔던 것이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정조의 공포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은애의 사건은 더 심각했다. 갑작스레 터진 폭력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여척 사건은 형이 절굿공이로 동생을 찧을 때, 포졸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은애를 괴롭혀온 추문은 자그마치 2년 동안 이어진 문제였다. 몰랐다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은애의 살인을 검토한 대신들의 의견은 명확했다.
“원한이 깊은 것은 압니다. 하나 설사 그보다 더 큰 원한이 있더라도 이장(里長)에게 고발하거나 관청(官廳)에 호소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인데, 제 손으로 복수를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대신들의 논리는 명확하고 분명했고 또 정당했다. 정조가 왕이라고 멋대로 풀어준 것이 사실 옳지 않은 거였다. 정조는 제 맘대로 공론을 무시하고 풀어주라며 독단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고도 저 자신의 전횡(?)을 호도하려고 ‘법보다 예교가 우선이라는 둥’ ‘이런 일은 널리 알려야 한다는 둥’의 소리를 하며, 이덕무에게 전(傳)을 지으라고 하고, 그녀의 이야기와 판결문을 팔도에 알리라고 수선을 피웠던 것이다. 대신들의 공론을 무시한 폭군의 행동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였다. 은애를 살리고 신여척을 살리는 백성을 위한 판결을 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어리석은 대신들을 두둔하는 판결을 내렸기에 반대란 말이다. 사실 은애와 신여척의 사건을 처리한 정조의 솜씨(?)를 보고 있으면, 정조가 대신들을 향해 속으로 혀를 차는 것 같다. 이렇게 말이다.
‘어허, 이런 갑갑한 자들을 보았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니 원….’
조선사회에 던져진 돌직구
은애의 문제와 신여척의 문제는 사회 예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문제였고, 그건 관료제를 바탕으로 한 조선 전체에 던진 무거운 질문이었다.
‘사또, 관찰사, 니들은 대체 그동안 뭘 했는데?’
은애가 이장과 사또에게 달려가 고소했어야 한다는 말은 은애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이장과 사또는 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말로 쉽게 바뀔 수 있었다. 동생을 절굿공이로 찧어 죽이려고 난동을 부리는 미친놈 같은 형을 애초부터 제대로 다스리는 것이 지방관의 책무인데 대체 그동안 너희는 뭘 했느냔 힐책이었다.
은애의 살인사건은 조선 사회에 던져진 묵직한 돌직구였다.
그래서 사또는 관찰사에게 미뤘고, 관찰사는 은애를 9번이나 끌어내서 엉뚱한 공범 타령만 줄곧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었던 거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악스런 할미의 행패를 못 들었을 리 없다. 수년 동안 이어진 그 험담을 못 들었다면 그것도 바른 목민관의 자세가 아니다. 이렇든 저렇든 은애의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할미를 잡아다가 혼쭐을 내든지, 할미의 모함을 믿고 은애와 그 집안을 결딴내든지, 뭐든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직무유기가 살인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아무튼 은애는 할미가 어린 처녀가 헤프다는 둥, 남자를 꾀어 밀회를 하려 했다는 둥 온갖 거짓말로 모함하는 동안은 꾹 참았다. 추잡하고 시끄러운 소문이 났지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하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정말 시집은 생각도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도 은애는 참았다. 할미를 만나 원한을 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만 참으면 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불이익이라면 더러운 소리를 들어 사람들이 손가락질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시집을 못 가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바깥일을 하기 어려운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결혼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냥 늙어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은애는 참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자 할미가 더 날뛰었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소문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은애는 더 이상 참기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문제, 사회 문제로 커졌기 때문이다. 자기만 참으면 되는 일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선량하게 자신을 믿어준 남편과 시댁에 큰 누를 끼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은애가 원래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로 약속해 놓고 지금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는 모함은 은애가 음탕하고 부도덕하다는 말을 넘어, 그렇게 음탕한 년을 얻은 남편과 그 집안 꼴도 알 만하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는 혼인하기로 약속하면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요 윤리였다.
심지어 정혼(定婚)하고 남편 될 사람이 죽는 경우가 발생해도 그대로 시집가서 평생 혼자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시대에 할미의 모함은 은애와 남편, 그 집안에 치명적이었다. 더 이상 할미의 패악에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래요 우리 집은 인륜을 저버린 몹쓸 종자예요”라고 시인하는 꼴이 되는 거였다.
나서지 못하는 것이 더 수치
결과적으로 할미를 죽이고 은애가 잡혔기에 살인이 쉬웠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은애의 살인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은애는 어리고 약했고 할미는 거칠고 억셌다. 둘이 맞부딪쳐 싸운다면 은애가 이길 게 아니라 할미가 손쉽게 제압할 상황이었다. 할미가 그토록 패악을 부려도 동네 사람들이 누구 하나 뭐라 나서지 못했던 것도 할미가 보통 드센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혀 온 은애를 보고 사또가 이렇게 다그쳤던 거다.
“할미는 억세고 너는 야리야리한데, 지금 시체에 난 칼자국을 보니 도무지 말이 안 된다. 너 혼자 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 공범이 있지? 바른대로 말해라!”
살인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차이가 현저했던 거다. 사실 잡혀 온 은애의 모습을 보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목에 칼을 쓰고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다리엔 족쇄까지 채워져 있었는데 약한 몸이 기운 없이 축 늘어져 형구를 제대로 지탱하지도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은애는 분명했다.
“아닙니다. 제가 살인자입니다.”
아무리 은애가 단독범이라고 말해도 사또는 믿을 수 없었다. 사또는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다.
사실 은애는 살인할 맘을 품었지만 자신이 성공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할미를 만만히 여겨 간 것이 아니라, 따지러 가면 할미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단 걸 알고도 갔다. 조금 후에 신여척 사건을 들으면 느끼겠지만, 조선시대 민간에서 서로 싸우다가 죽는 일이나 폭력은 꽤 빈번했다. 은애는 억센 할미에게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단 생각을 하고도 갔다. 다시 말해, 할미를 죽일 수 있단 확신에서 간 것이 아니라 제 목숨을 걸고 간 거였다.
은애가 도저히 할미의 상대가 아니었다는 건 부엌칼을 들고 나타난 은애를 보고 할미가 비웃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할미는 칼을 든 은애를 보고도 비웃었다.
“찌르려고? 그래 어디 한번 찔러 봐!”
결과적으로 할미는 은애를 얕잡아 본 것 때문에 죽었다. 하지만 할미가 얕잡아 볼 정도로 은애는 약하고 가냘팠다. 그래도 은애는 나섰던 것이다. 그냥 참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서지 못하는 것이 더 부끄럽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정조의 현명한(?) 판결
어떻든 살인은 큰 죄였다. 사또는 해결할 수 없었다. 상급 기관인 관찰사에게로 올렸다. 관찰사 역시 쉽게 판결할 사안이 아니었다. 공범이 있느냐고 엄하게 추궁하기를 9번이나 반복할 뿐이었다. 목에 칼을 차고 족쇄에 붙들려 꼼짝도 못하는 은애는 축 늘어져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규중(閨中)의 처녀를 모함해서 더럽게 하는 것은 천하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결혼했는데도 그치지 않고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회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입니다.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지만, 사람을 죽이면 관가에 잡혀가 저 자신도 죽을 거란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찌 공범이 있어서 도움을 청했겠습니까.”
관찰사는 은애가 불쌍했다. 그동안 감옥에서 계속 고생하며 심문과 문초를 받은 것만 생각해도 죗값으로는 충분했다.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판결을 뒤로 미루며 시간이 끌었다.
1790년 여름, 정조 임금의 아들이 태어나는 경사가 있었다. 보통 이런 좋은 일에는 사형수를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다. 이때를 타서 관찰사가 은애의 사건을 정조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형조에서 이 사건을 꼼꼼히 논의하라 지시한다.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결국 의견이 모였다.
“은애가 지극한 원한을 갚은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것은 정상참작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대신들의 공론을 막으며 정조가 나섰다.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본분인 여자가 음란하다는 모함을 당했다. 그것은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천하에 가장 원통한 일이다. 보통 정절(貞節)을 지키려는 여자들이 택하는 가장 쉬운 것은 자살이다. 그것으로 자신은 결백하다고, 모함이 원통하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애는 그런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부엌칼을 들고 원수를 죽여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자신은 흠이 없다는 것을 알렸다. 그렇게 세상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려 사회 기강을 일깨우고 바른 풍속을 세웠다. 옛날이라면 표창을 하며 칭찬할 일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판결한다.
“그동안 감옥에 갇혀 고생한 것으로 죗값은 다 되었다. 목숨은 살려주도록 해라.”
정조의 판단은 현명했다. 은애는 다른 여자들처럼 소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와 부딪쳤던 것이다. 도저히 힘으로는 이기지도 못할 할미에게 목숨을 걸고 덤볐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억울함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과 그 집안, 나아가 사회윤리와 기강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정조는 은애의 사건을 이야기로 적어 널리 알리라고 지시했다.
정조의 판결은 간단했다. 법대로 하자면 살인죄는 중형에 해당하나 사회예속에 따르면 용서받을 만하다는 거였다. 즉 정조는 ‘법(法)과 예교(禮敎)’ 중에서 예교를 택했던 것이다. 《예기(禮記)》에 따른, 상층 양반들은 예(禮)로 다스리고 하층 백성들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에서, 아래의 백성들도 예로 다스리려 한 것이다. 정말 성군(聖君)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런 생각뿐이었을까? 단지 백성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부였을까?
신여척 사건
은애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나오지만 정황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우리가 제대로 은애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은애전(銀愛傳)》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애전》이 실린 이덕무의 《아정유고(雅亭遺稿)》를 보면, “경술년(1790) 6월 임금께서 옥안(獄案)을 심리하시다가 김은애(金銀愛)와 신여척(申汝倜)을 살리게 하시고, 나에게 명령하시어 《은애전》을 짓게 하셨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러니까 은애 말고도 신여척이란 자도 정조가 같은 의도로 살려주었단 것이다. 그렇다면 신여척 사건을 살펴보면 정조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여척은 전라도 장흥 사람인데, 이웃에 김순창(金順昌), 김순남(金順南)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 김순창이 아내와 함께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다. 아내가 집에 있던 보리가 줄어들었다는 소리를 했다. 그 말에 형 순창은 동생 순남이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순창은 우악스러웠다. 바른대로 말하라며 윽박지르는 형의 서슬에 동생은 억울하다며 눈물만 흘렸다. 본래 성질이 난폭하고 무지막지했던 형 순창은 동생의 머리를 절굿공이로 내리쳐 거의 죽게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 순창을 말리자,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난리를 피워댔다. 이런 황당한 소리를 들은 옆집의 신여척이 달려와 미친 듯이 날뛰는 순창의 상투를 틀어쥐었다.
“절굿공이로 동생을 때리다니, 너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이런 못된 놈 같으니라고.”
갑자기 나타나 꾸지람을 하는 신여척에게 순창은 화가 났다.
“내가 내 아우를 때리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러며 신여척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신여척이 의리로 타이르는데도 듣지 않고 발길질을 하니 나도 발길질을 하겠다며 순창을 냅다 차버렸다. 그런데 그게 탈이 났다. 복부를 강타당한 김순창이 그대로 고꾸라져 비슬비슬 거리다가, 이튿날 결국 죽어 버렸다.
사람들은 쉬쉬하며 덮어두려 했지만 결국 알려져 신여척이 옥에 갇혔다. 그가 살인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사람을 죽인 거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미필적 고의(未畢的 故意)’였다.
이에 대한 정조의 판결은 은애의 경우와 같았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애가 없는 자의 죄를 다스린 것은 기개가 있는 행동이라며, 그를 풀어주라고 한 것이다.
정조의 고민
신여척 사건을 보면, 정조의 고민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법과 예교에서 예교를 택한 것처럼 보이나, 기실은 법을 택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사실 동생을 절굿공이로 쳐서 죽이려고 난동을 부리는 형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충분히 둘러싼 정황이 짐작된다.
만약 조폭들이 눈을 부라리며 동네방네 다니고 여기저기 을러대며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느닷없는 폭력을 벌건 대낮에 벌이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이 마을 저 거리에 ‘깡패’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그 시절이 행복한 시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행패, 패악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대체 포졸들은 어디 있는 거야?’
바로 그렇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본질이었다.
물론 동생을 때려죽이려고 한 형은 깡패는 아니었고, 또 동네 사람들을 때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패악질을 마음 놓고(?) 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의 사회 풍속은 한심한 상황이었다. 나라가 과연 제대로 다스려지고 있는 것일까? 신여척이 한 일은 그때, 사또도 포졸도 나서지 않은 그때, 멀리 있는지 아직 듣지도 못했는지 아무튼 공권력이란 것이 눈앞에 없던 그때, 분연히 나서서 폭력을 멈추게 하고 일을 매듭지으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포졸도 관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감옥에 갔던 것이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정조의 공포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은애의 사건은 더 심각했다. 갑작스레 터진 폭력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여척 사건은 형이 절굿공이로 동생을 찧을 때, 포졸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은애를 괴롭혀온 추문은 자그마치 2년 동안 이어진 문제였다. 몰랐다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은애의 살인을 검토한 대신들의 의견은 명확했다.
“원한이 깊은 것은 압니다. 하나 설사 그보다 더 큰 원한이 있더라도 이장(里長)에게 고발하거나 관청(官廳)에 호소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인데, 제 손으로 복수를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대신들의 논리는 명확하고 분명했고 또 정당했다. 정조가 왕이라고 멋대로 풀어준 것이 사실 옳지 않은 거였다. 정조는 제 맘대로 공론을 무시하고 풀어주라며 독단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고도 저 자신의 전횡(?)을 호도하려고 ‘법보다 예교가 우선이라는 둥’ ‘이런 일은 널리 알려야 한다는 둥’의 소리를 하며, 이덕무에게 전(傳)을 지으라고 하고, 그녀의 이야기와 판결문을 팔도에 알리라고 수선을 피웠던 것이다. 대신들의 공론을 무시한 폭군의 행동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였다. 은애를 살리고 신여척을 살리는 백성을 위한 판결을 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어리석은 대신들을 두둔하는 판결을 내렸기에 반대란 말이다. 사실 은애와 신여척의 사건을 처리한 정조의 솜씨(?)를 보고 있으면, 정조가 대신들을 향해 속으로 혀를 차는 것 같다. 이렇게 말이다.
‘어허, 이런 갑갑한 자들을 보았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니 원….’
조선사회에 던져진 돌직구
은애의 문제와 신여척의 문제는 사회 예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문제였고, 그건 관료제를 바탕으로 한 조선 전체에 던진 무거운 질문이었다.
‘사또, 관찰사, 니들은 대체 그동안 뭘 했는데?’
은애가 이장과 사또에게 달려가 고소했어야 한다는 말은 은애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이장과 사또는 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말로 쉽게 바뀔 수 있었다. 동생을 절굿공이로 찧어 죽이려고 난동을 부리는 미친놈 같은 형을 애초부터 제대로 다스리는 것이 지방관의 책무인데 대체 그동안 너희는 뭘 했느냔 힐책이었다.
은애의 살인사건은 조선 사회에 던져진 묵직한 돌직구였다.
그래서 사또는 관찰사에게 미뤘고, 관찰사는 은애를 9번이나 끌어내서 엉뚱한 공범 타령만 줄곧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었던 거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악스런 할미의 행패를 못 들었을 리 없다. 수년 동안 이어진 그 험담을 못 들었다면 그것도 바른 목민관의 자세가 아니다. 이렇든 저렇든 은애의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할미를 잡아다가 혼쭐을 내든지, 할미의 모함을 믿고 은애와 그 집안을 결딴내든지, 뭐든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직무유기가 살인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대번에 알아차린 정조의 고민은 깊었다. 그래서 그냥 덮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둔해서가 아니라 너무 밝아서, 몰라서가 아니라 분명히 알기에 재빨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무능한 관료들의 행태와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하소연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현명한 정조는 유연하게 덮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정조는 무죄 방면이라는 호들갑스런 팡파르로 ‘우리의 시스템은 잘 유지되고 있으니 백성들이여 안심하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벽창호처럼 갑갑한 대신들이 원리원칙을 꼬치꼬치 따지고 나섰던 거다. 자신들의 바지가 흘러내려 엉덩이가 다 나왔는데도 그걸 모르고 《예기》에서 말한 법과 예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고상한 척 짐짓 “에헴, 에헴” 따지고 앉았던 거다. 무능한 관료제와 법 체계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어리석고 한심하게도 말이다.
정조의 한숨 섞인 의도는 이런 거였다.
“이 작자들아, 정신 좀 차려. 니들 엉덩이가 다 보인다고.”⊙
그런데 벽창호처럼 갑갑한 대신들이 원리원칙을 꼬치꼬치 따지고 나섰던 거다. 자신들의 바지가 흘러내려 엉덩이가 다 나왔는데도 그걸 모르고 《예기》에서 말한 법과 예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고상한 척 짐짓 “에헴, 에헴” 따지고 앉았던 거다. 무능한 관료제와 법 체계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어리석고 한심하게도 말이다.
정조의 한숨 섞인 의도는 이런 거였다.
“이 작자들아, 정신 좀 차려. 니들 엉덩이가 다 보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