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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불 끄러 왔다는 ‘신패’차고 현장 출동

바람아님 2018. 3. 27. 08:27
동아일보 2017-12-11 03:00
 
금화도감 소속 소방수 ‘금화군’
1904년 경운궁 화재 모습. 중화전 주변 전각 대부분이 내려앉았고, 일본 군인들이 건물 잔해를 뒤지고 있다. ‘디 일러스트레이션(The Illustration)’에 실린 사진이다. N 프랜시스 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도성 안에 금화(禁火)의 법을 담당하는 기관이 없어 백성들이 부주의로 화재를 일으키면 집이 타버려 재산이 탕진되오니 그들의 생명이 애석하옵니다.”(조선왕조실록 1426년 2월 26일 기사 중)

1426년(세종 8년) 2월 15일 인순부(동궁에 딸려 있던 관아)에 살던 노비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가 거센 바람을 타고 민가와 관아 2000여 채를 태웠다. 이 사고로 32명이 숨지고,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당시 한양에 있던 가옥 1만8000여 채 가운데 10분의 1이 넘게 불타버린 큰 화재였다.

나무로 지은 데다 지붕을 지푸라기로 엮어 덮은 초가(草家)가 대부분이었으니 불이 한번 붙으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불이야!’ 소리에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불을 끄는 데 정신을 쏟는 틈을 타 좀도둑이 일부러 불을 지르기도 했다. 오후 10시∼오전 4시 통행을 금지한 인정(人定) 제도는 밤에 방화하고 도둑질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화재가 잇따르자 세종은 조선 최초의 소방기구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한다. 여기에 금화군(禁火軍) 또는 멸화군(滅火軍)이라 불리는 전문 소방수를 배속시켰다. 이들은 종루(鐘樓·종로네거리 일대)에서 화재를 감시했고, 방화벽을 설치하거나 각종 화재진압도구를 준비했다. 일정 구역마다 물을 담은 항아리를 비치하고 우물을 파도록 했으며,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도록 간격을 두고 도로를 넓히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는 등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애썼다.

화재가 일어나면 금화군은 불을 끄러 왔다는 신패(信牌)를 차고, 물을 떠오는 역할을 맡은 급수비자(汲水婢子)와 함께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출동했다. 화재 진압 중에는 계속 종을 울렸고 불이 난 곳 근처에 높은 깃발을 세워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금화군은 밧줄과 긴 사다리로 지붕으로 올라가서 쇠갈고리로 지붕의 기와나 짚을 걷어냈다. 도끼로 기둥을 찍어 건물을 무너뜨렸다. 목조주택은 복구할 수가 없었기에 화재를 진압하기보다는 불이 난 건물을 무너뜨려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오늘날처럼 물을 직접 뿌리는 수총기(水銃器)는 1723년(경종 3년)에 청나라에서 들여왔다.

금화도감은 성문의 관리 업무를 추가로 맡아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개편되지만 얼마 못 가 필요 없는 비용과 인원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혁파됐고 소방업무는 한성부에서 담당했다.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警務使)가 소방을 맡았다가 일제강점기에 소방서가 생겨났다.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