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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개헌(改憲), 당하다

바람아님 2018. 4. 4. 08:29


중앙일보 2018.04.03. 02:43


청와대 내부 작품인 이번 개헌안은
숙의 과정 뺀 채 시민 참여로 치장
주권을 돌려주겠다는 초심도 위배
개헌안 부결되면 야당이 비난받는
고도의 정치 계산까지 넣었을 것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개헌을 발의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비장했다. 민주공화국 70년, 그 영욕의 세월에 각인된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염원이 드디어 실현되는 순간이다. 모든 법의 근원,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쇄신하는 30년 만의 대사건. 헌법은 국가의 역사적 이력(履歷)과 미래 진로를 확정하는 최상급 장전(章典)으로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절대적 합의이자 명령이다.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 꺼림칙함과 우려가 쌓이는 것은 웬일인가?


개헌은 대선 공약이고 국회의 직무유기를 더 방치할 수 없었다는 대통령의 명분은 설득력이 있었지만 어쩐지 토를 달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 없다. 독주(獨走)의 느낌, 촛불광장에서 외쳐진 ‘개헌’에 또다시 광장 시민들은 구경꾼으로 내쳐졌다는 낭패감 때문이다. 촛불은 저당 잡힌 주권에 대한 분노였고 정권이 오염시킨 주권을 돌려달라는 절규였다. 현 정권은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청와대 본관에 촛불 그림을 걸었다.


그런데 이렇게 뚝딱 만들어내도 되는가? 주권 행사의 최상급 사안이 개헌인데 불과 40여 일 만에, 그것도 급히 모인 ‘국민헌법자문특위’ 30명이 주도했다. 이들의 전문성에 시비를 걸려는 게 아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17차례 회의, 지방 토론회와 간담회, 수차례 여론조사와 방문 인터뷰를 시행했다. 참여자가 580만 명을 헤아린다고도 했다.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참여자들이 대통령제와 통치구조에 대해 어떤 의견을 피력했는가? 지방분권, 선거제도, 권력기구 개편에 대해서는? 보도자료에 의하면 ‘숙의 토론회’를 다섯 차례 개최했고, 6시간씩 심층토론을 했다는 것이다. 원전 하나에 4개월이 걸렸는데, 너무나 중대한 수많은 쟁점을 6시간 토론했다? 토론 방식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특위가 개최한 시민 참여 활동이 언론, 방송에 보도된 바는 없다.


지난해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원회’는 숙의민주주의의 좋은 사례다. 숙의는 반론과 재반론, 설득과 설복이 얽히는 논쟁 과정이다. 특위가 강조한 580만 명은 거의 댓글 참여였거나 설문조사였을 거다. 특위 분과 전문가들의 이념적 성향은? 이들의 개인적 신념과 선호가 관철되지 않았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2017년 11개월간 활동했던 여야 합동 ‘국회개헌특위’ 개헌안도 시민적 숙의가 없었다는 점에서 결격이다. 청와대발 개헌안은 주권을 돌려준다는 초심을 위배한다. 거두절미, 시민 참여로 치장된 청와대 내부 작품이다.

송호근칼럼
대통령 개헌안은 분명 진일보한 면모를 갖고 있다. 다만 공화국 70년 역사 위에 대한민국의 뼈대를 새로 세우려 한다면 적어도 ‘시민자치’를 통과해야 했다. 예를 들면 전국 시·군·구 중 100개를 선발해 약 100명으로 구성된 시민회의를 소집하고, 두어 달 심층토론을 하는 방법이다. 숙의된 시민 의사가 전문가의 집중 심의를 거치면 걸작품이 탄생한다.


당장 헌법 1조부터 걸린다. 국가 정체성에 해당하는 1조 3항에 ‘지방분권 국가를 지향한다’가 왜 들어갔는가? 그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인가? ‘민주공화국’(1항), ‘국민주권’(2항) 개념과 급이 맞지 않고, 연방제를 떠올리게 한다. 국정을 국무회의와 국가자치분권회의로 이원화하자는 이야기인가? 내각제 등 대안이 폐기되고 대통령 4년 연임제가 왜 채택되었나? 청와대의 뜻인가? 대통령 결선투표는 좋으나 정당 난립은 문제다. 정당 설립 요건을 무한정 낮췄다.


국회와 사법부의 자율 권한은 다소 향상됐다. 그러나 개헌의 최대 현안인 대통령 권한 분산은 거의 변화가 없다. 책임총리제는 아예 언급이 없고, 4대 권력기관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도 거의 그대로다. 제왕적 대통령이 8년을 통치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압살?


경제와 노동 영역은 법정 다툼과 분쟁 소지를 품은 조항이 즐비하다. 개헌안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노조, 시민, 사회단체는 신고만으로 집회와 결사를 보장했다. 권리는 강하고 윤리는 증발한다. 권리장전이다. 최저임금과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헌법에 명시한 나라가 있는가? 노동자와 사용자의 ‘동등한 지위’(33조 4항)와 경제 주체의 ‘상생’(125조 2항)을 종합해 읽으면 그렇지 못한 기업인은 헌법 위반이다. 왜 노사문화와 자율 규범에 맡길 일을 헌법에 명시하는가? 구절구절 축조 심의가 필요한 이유다.

개헌은 고도의 정치행위다. 부결되면 야당이 맹렬한 비난에 몰릴 장면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개헌안은 대한민국을 어떤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가? 최고의 국가적 과제인 개헌을 이렇게 흘려보낼 수는 없다. 직무유기 국회가 가부 결정의 짐을 안았지만, 차라리 공론화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청와대 리포트, ‘개헌 당한’ 느낌부터 짚어 봐야 한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