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5.11. 01:15
탐욕자본주의·정글사회 거부한
문재인의 사회주의 실험과 도전
당당하게 내놓고 국민 심판 받자
81년 5월 10일 프랑스에서 사회당(PS·Parti Socialiste)의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중심제의 제5공화국 출범 이후 23년 만에 처음으로 중도 좌파의 사회주의자가 집권하는 사건이었다.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공약한 미테랑은 급진적 개혁에 돌입했다. 최저임금 인상(15%), 주 39시간의 노동시간 단축, 연 5주간의 유급휴가, 노동자의 경영 참여 보장, 공공기관의 20만 명 신규 채용을 단행했다. 30여 개의 금융기관과 통신·항공 등 주요 대기업을 국유화하고, 주택수당·가족수당·노령연금을 대폭 올리며 사회보장도 강화했다. 모든 국민에게 생계비를 지원하는 최저소득제(RMI)와 부자들에게 물리는 ‘부유세’를 도입한 것도 미테랑이었다. 기득권 체제를 일거에 청산하려는 광풍이었다.
문재인의 1년은 그 판박이다. 최저임금 인상(16%), 최대 주 52시간 근무제, 공기업 노동이사제, 81만 개의 공공일자리 창출, 아동수당 지급, 기초연금 인상이 그대로 빼닮았다. 산업구조 개편의 성격을 띤 ‘재벌 개혁’과 법인세·소득세를 강화한 ‘부유세’도 비슷하다. 베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미테랑의 사회주의 꿈은 현실의 장벽 앞에서 채 2년도 안 돼 허무하게 무너졌다. 가중되는 실업과 인플레 압박, 성장 없는 분배에 따른 재정적자, 중산층의 불만에 가로막혔다. 대중의 저항에 봉착하자 그는 미련 없이 사회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보수적 시장경제로 급선회했다. 좌(左)로 집권하고 우(右)로 통치한다는 치욕적인 비판도 감수했다.
문재인의 실험도 불안하다. J노믹스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1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실업률을 비롯해 일자리·물가 등 미테랑을 좌절시킨 늪에 똑같이 빠져드는 양상이다. 세금으로 퍼주기 잔치를 벌이다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악담을 참아야 하는 처지다.
미테랑식 사회주의는 ‘연대와 재분배의 원칙에 입각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온건한 개혁 노선’으로 평가된다. 사유재산 폐지와 계급투쟁에 기반한, 소련 붕괴 후 90년대 용도 폐기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문재인의 ‘사람 중심 경제’는 미테랑의 ‘노동의 인간화’와 맥이 통한다. 이를 남미의 좌파 포퓰리즘이나 세습 독재의 북한식 사회주의에 빗대 매도하는 건 억지에 가깝다.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사회주의적 정신은 여전히 소중하다. 80년 프랑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3000달러였고, 한국은 1700달러에 불과했다. 현재 우리는 3만 달러와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30-50 클럽’에 속한다. 30여 년 전 미테랑이 좌절한 경제 환경과는 다르다. 우리가 똑같은 전철을 밟으라는 법은 없다. 비정한 경제논리를 살짝 벗어나 강한 자와 가진 자의 양보를 조금 얻어낸다고 프랑스를 사회주의 국가로 부르지 않는 듯이 대한민국이 시장경제를 토대로 한 자본주의 국가라는 본질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 문재인은 집권 2년 차에 들어섰다. 가보지 않은 길에 도전하지 않으면 발전은 없다.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모호한 포장을 걷어 내라. 사회주의 실험이란 이름을 당당히 내걸고 국민의 동의와 이해를 구할 때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 이 실험이 ‘문재인 정신’으로 남을지, 공허한 망상으로 끝날지 머지않아 판가름날 것이다. 여기서 각오할 게 하나 있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중도에 포기하는 게 진정한 용기다. 미테랑의 실패 이후 추락을 거듭하던 프랑스 사회당은 지금 존폐의 기로에 설 정도로 쫄딱 망했다. 어설픈 사회주의는 그만큼 비극적이고 치명적이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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