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6.27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토용, 경주 용강동고분, 국립경주박물관.
1986년 6월 16일, 장대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경주고적발굴조사단 조유전 단장과
신창수 학예사 등 조사원들은 경주 용강동에서 '폐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신라문화동인회 회원들의
거듭된 발굴 요청을 당국이 받아들였지만, 훼손이 극심해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조 단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무덤의 위상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지름이 16m, 둘레가 50m나 되었고 축조에 구사된 기술이 통상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 사실은 곧바로 언론에 알려져 '경주 용강동고분, 왕릉 추정'이라 보도되면서
'폐고분'은 일약 왕릉급 무덤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7월 15일, 석실 입구를 막고 있던 돌문짝을 떼어내자 돌을 차곡차곡 쌓은 다음 표면에 회를 발라
완성한 석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천장 한쪽이 도굴로 뚫려 있었던 것이다. 흙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도굴꾼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소주병과 함께 무덤 주인공의 유해를 안치하는 데 쓰인 석제 베개, 어깨받침, 발받침 등이 발견됐다.
7월 19일, 채색된 토용(土俑·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이 발견된 것을 신호탄으로 이튿날부터 토용과 청동제 십이지신상 등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상은 머리에 복두(幞頭)를 쓰고 홀을 잡은 문관상이었고, 여인상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모습이었다. 산 사람을 함께 묻어주던 풍습이 사라지며 생긴 순장(殉葬) 대용품이다.
조 단장은 그 순간을 "너무 놀라 탄성도 잊었다"고 회고했다. 지석(誌石)이 출토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기대는 빗나갔고
그 대신 15~20세에 해당하는 치아 여러 개를 수습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삼국 통일 직후 만들어진 이 무덤은 신라 왕릉이라 보기는 어려우나 그에 준하는 무덤임은 분명해 보인다.
도굴의 피해를 입었지만, 그 속에서 출토된 유물은 1200년 전 신라인들의 장례 풍습뿐만 아니라 그들이 입었던 옷 모양,
헤어스타일 등 다양한 정보를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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