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상속의 역사] 역사 속 환관 가문의 상속

바람아님 2018. 10. 8. 08:42
신동아 2018.10.07. 09:01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나, 옛날 옛적에는 환관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세된 사람들이었다. 친자녀를 둘 수 없었던 그들도 가문의 전통을 잇고, 재산을 물려줄 방법을 고안했다.

청나라 마지막 환관. [magnum photos]
고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 나라 왕실에 환관이 있었다. 이미 기원전 21세기 수메르에도 환관이 존재했다. 멀쩡한 남성을 거세해 왕궁에 두고 여러 가지 잡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환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셈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환관은 '통치자의 귀' 노릇을 했다. 그들은 왕의 침실을 깨끗이 청소했고, 왕의 이발과 목욕을 살폈다. 대체로 궁중의 하찮은 일을 도맡았다. 그들의 임무는 비록 하찮은 것이었으나, 환관은 권력자의 최측근이었다. 그 때문에 왕의 신임이 두터워 환관의 권세가 비대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환관의 출신은 미천했다. 이미 어린 나이에 거세된 경우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친자녀를 거느리지 못해 사가(私家)의 미래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환관이란 제도를 오랫동안 운영했다. 환관은 일종의 소모품이었다. 왕의 마음에 들면 가까이에 두고 별의별 일을 다 시켰다. 그러다가도 왕의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가차없이 버렸다. 환관의 목숨은 왕의 뜻에 달려 있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충성스럽고 유능한 환관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이름난 재상과 학자도 적지 않았다. 기원전 4세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에는 바고아스라는 환관이 있었다. 그 이름 자체가 환관을 의미했다고 하는데,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신임을 얻어 수상 자리에 올랐다. 나중에는 왕과 사이가 나빠져 왕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신왕 다리우스 3세가 바고아스를 처단했다.

정치 입김 거센 환관

환관의 정치 개입은 로마제국 후기에도 나타났다. 비잔틴제국(동로마) 때도 환관들이 왕궁의 사무뿐만 아니라 국가의 행정 전반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환관 출신인 나르세스 장군이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외원정군 사령관이 돼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중국에는 이름난 환관이 더욱 많았다. 1세기 중국에서 사상 최초로 종이가 발명됐다. 기록에 따르면, 종이를 발명한 이는 한나라의 환관 채륜이다. 그는 궁중의 공방 책임자인 상방령이었다. 채륜은 손재주가 뛰어나 여러 가지 도구를 발명하기도 했는데, 나무껍질과 삼베, 낡은 천 등을 이용해 종이를 만들었다(105년). 이것이 바로 '채후지'였다. 송나라 환관 가헌은 수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황제구장산경상해'와 '석쇄산서'라는 저작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고대 역사서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도 환관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한무제의 미움을 사 궁형(宮刑)을 당하고는 환관이 됐다. 사마천은 극심한 모욕과 수치를 감내하고 마침내 불후의 업적을 남겨 후세로부터 끝없는 존경을 받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환관은 친혈육을 남기지 못했다. 수십, 수백 명의 존비속에 둘러싸인 사대부에 비하면 환관의 가문은 단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들은 사대부보다는 환관을 더욱 신뢰했다. 베트남 역사에도 비슷한 경향이 목격된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환관과 사대부 간 반목과 갈등이 심했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환관이 많았으나, 사대부들에 의해 그들의 역할이 왜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엄밀히 말해 환관 중에는 황제의 이익을 위해 심혈을 쏟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와 달리 사대부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더욱 철저했다. 양자의 충돌은 피치 못할 일이 됐다.

부패 권력의 상징

베트남에서는 환관을 고를 때 선천적으로 성기에 이상이 있는 10세 전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 심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사마천처럼 거세형을 받은 사람 중에서 환관을 선발했다. 특히 진나라와 한나라 때 이런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중국 남쪽 지방의 소수민족 가운데서 환관을 골랐다. 거란족 요나라는 중국인(한족)과 주위의 여러 민족 중에서 환관을 뽑았다. 원나라는 세계제국이었던 만큼 환관의 선발 범위도 가히 세계적이었다. 서양·인도·중국·한국 사람이 모두 환관으로 활동했다. 그 전통은 명나라에 이어졌다. 명나라 궁궐에도 몽골 출신을 비롯해, 한국(1435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중앙아시아, 태국 및 오키나와 출신의 환관이 뒤섞여 있었다. 


명나라 말기, 중국의 환관 수는 7만 명이었다. 그들은 방방곡곡에 배치돼 다양한 업무를 관장했다. 대궐 안에는 일부 환관들이 남았다. 환관의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무려 10만 명을 헤아렸다. 


명나라의 환관들은 국가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그들은 소설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흉악한 존재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환관은 백성을 쥐어짜 세금을 멋대로 갈취하고, 인육을 먹는가 하면 변태적 성행위를 일삼는 사악한 존재라고 돼 있다. 이것은 분명 부풀려진 내용이었으나 일정한 역사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환관은 부패 권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환관의 횡포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크게 일어난 적도 있다. 청 왕조는 환관의 수를 계속 줄였다. 말기에는 환관의 수가 2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권력은 여전히 대단했다. 먹고살기 위해 거세의 고통을 무릅쓰고 환관을 자원하는 평민이 많았으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고려 때부터 환관을 제도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환관은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명나라와는 다른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거세를 하더라도 고환만 잘라내는 경우가 많아 결혼한 뒤에도 성생활이 가능했다는 의견이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궐 안에는 140명쯤의 내시가 다양한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수치가 아니다. 실학자 이익의 기술에 따르면, 조선 후기 우리 조정에는 환관이 335명, 궁녀가 684명이며 이들이 받는 녹을 합치면 쌀 1만1430석이라고 돼 있다(성호사설, 제24권, '환관궁녀'). 환관에게는 정치적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만큼 유교 경전에 관한 시험을 매달 치렀다고 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내시의 수명은 대략 70세 정도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평민보다 10여 세나 길다. 그런데 신빙성은 좀 떨어진다. 젊은 시절 질병으로 희생되거나 궁중의 폭력에 노출돼 절명한 사람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의 환관은 체격도 좋고 목소리도 남자다웠다. 그 언행에도 위엄이 있었다고 하고, 궐내의 건물을 보수하는 등 육체노동도 너끈히 감당할 정도였다.

권력 농단한 명나라 환관, 위충현

명나라 선덕제의 환관들. [위키피디아]
중국 명나라의 환관은 위세가 대단했다. 그들 중 위충현이 악명이 가장 높았다. 허베이성 창저우 출신의 평민으로 본명이 '위사'인 위충현은 22세 때 도박으로 패가망신하자, 처자를 버린 채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됐다. 이름도 이진충으로 바꿨다. 

이진충은 대궐의 화장실 청소를 맡았다. 얼마 뒤 뇌물을 써 고역에서 벗어난 그는 어린 왕자 주유교의 시종이 되었다. 왕자이긴 하지만 주유교의 처지는 최악이었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이진충은 그런 주유교를 극진히 섬겼다. 운이 좋았던지 주유교의 아버지 주상락은 사대부 당파인 동림당의 후원으로 태자가 되었고, 주유교는 황세손으로 책봉됐다. 주유교는 이진충의 충성에 감격해 본래의 성을 되찾아주었다. 이름도 '현명한 충신'이라는 뜻에서 '위충현'으로 바꿔주었다. 


얼마 뒤 주상락이 황제가 되었으나, 수개월 만에 병사했다. 뒤를 이어 15세의 주유교가 황제가 되었다. 천계제였다. 위충현은 새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황제의 유모 객씨와 정치적으로 결탁해 대권을 좌우했다. 

어린 천계제는 위충현을 환관의 우두머리인 병필태감으로 삼았다. 얼마 뒤 황제는 비밀정보기관 '동창(東廠)'의 지휘권까지 위충현에게 맡겼다. 영락제가 설치한 동창은 황제의 직속기관으로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대신들의 동정을 감시해 만약 문제가 발견되면 황제 직속의 금의위를 움직여 가차 없이 숙청했다. 이 기관도 결국 위충현의 지휘를 받았다. 


그런 위충현에게도 강력한 정적이 있었다. 동림당이었다. 동림당은 성리철학을 이념적 무기로 삼았는데, 주로 강남 사대부들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했다. 동림당은 위충현에 대한 탄핵을 서둘렀다. 무려 24가지 죄목을 들어 황제에게 위충현의 처단을 요구했다. 

위기에 처한 위충현은 황제의 유모 객씨의 도움으로 재기했다. 이제 동림당과 본격적으로 싸우게 됐다. 자신을 궁지로 몬 양련 등을 체포해, 모진 고문을 가한 끝에 죽였다. 위충현은 동림당파를 하나씩 적발해 숙청했고 그들의 구심점인 동림서원도 폐쇄했다. 


위충현의 권세는 갈수록 커져 황제를 능가할 정도가 됐다. 절강순무 반여정은 위충현의 생사당을 세웠다(1626년). 기고만장한 위충현은 자신을 요임금과 순임금에 비겼다. 바깥 행차를 할 때마다 그는 환관 3000명으로 호위병을 삼아 '구천세'를 외치게 했다. '만세'는 황제를 위해 남겨두었다. 

조정 대신들도 위충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특히 대신 고병겸은 아부가 심했다. 그는 위충현을 아버지라 부르며, 제 아들을 손자로 삼아달라고 했다. 또 대학사 위굉징은 위충현의 조카로 행세했다. 위충현은 병약한 천계제 이후의 권력 구도까지 좌우할 듯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1627년 천계제가 세상을 뜨자 황위는 그의 아우(숭정제)에게 돌아갔다. 동림당과 기맥이 통하던 숭정제는 위충현을 축출할 셈이었다. 황제는 우선 객씨부터 조용히 은퇴시켰다. 이어서 위충현의 심복들을 제거했다. 그러고는 위충현을 향해 숙청의 칼을 뽑았다. 남경으로 가서 황릉을 돌보라고 하더니 금의위를 급파해 그를 체포하라고 했다. 종말을 예감한 위충현은 자결했다. 숭정제는 위충현의 시신을 능지처참했다. 


중국 역사는 위충현을 일컬어 권력을 농단한 간신 중의 간신이라 한다. 그는 과연 간신이었을까. 천계제는 위충현을 뭐라고 판단했을까. 혹시 자신을 보필하기에 진력한 충신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 사람의 충역(忠逆)을 재단하기란 수월하지 않다. 

위충현에게는 최정수라는 심복이 있었다. 그는 수뢰죄로 파면당하게 됐을 때 위충현에게 달려가 충성을 맹세하며 살기를 바랐다. 이후 최정수는 동림당 탄압의 선봉이 됐다. 위충현은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 양부와 양자는 동림당의 처벌에 앞장섰으나, 결국 숭정제로부터 역풍을 맞았다. 


위충현이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고난의 시절을 넘지 못하고 죽고 만 것 같다. 이후 위충현에게는 '의사(擬似) 가족관계'가 형성됐다. 언급했듯이, 문관 최정수와 대신 고병겸은 위충현의 양아들이요, 대학사 위굉징은 양조카가 됐다. 이들 양아들과 양조카는 위충현의 권세를 빌려 부귀와 권세를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천계제 사후 위충현이 몰락하자 상황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그들 또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환관의 권력은 믿을 것이 못 됐다. 평소 권력자는 환관을 최측근에 두었으나, 언제든 마음대로 내칠 수 있었다.

충직한 환관 김처선

이웃 나라 조선의 사정은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환관의 권세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들의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강화될 기미가 보이면,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견제했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한나라와 당나라의 선례를 열거하며 임금을 압박했다. 

사대부들은 환관에 관한 일이라면 나쁜 쪽으로 과장하는 경향이 강했다. 17~18세기 실학자 이익은 예외적이었다. 그는 환관 중에도 충신이 적지 않다며 연산군 때의 환관 김처선(金處善)을 기렸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제6권)에는 김처선의 행적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연산군이 실정을 거듭하자 김처선은 힘껏 간언했다. 연산군은 그를 미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이 처용(處容) 놀이를 했는데 매우 음란했다. 김처선은 집을 나서기 전 식구들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는 대궐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간언했다. "저는 네 분의 임금을 섬겼습니다. 경서와 역사책을 대강 압니다마는 전하처럼 행동하는 임금이 고금에 없었습니다." 연산군이 화를 참지 못해 그에게 화살을 쏘았다. 성난 연산군은 그를 죽인 다음, 누구도 '처(處)'란 글자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때 권벌(權)이란 선비가 과거시험에 합격했는데, 알고 보니 답안지에 '처(處)' 자를 썼다. 그 때문에 그의 합격이 취소되는 어처구니없는 소동이 벌어졌다.조선의 환관은 대가 끊어지면 제례(祭禮)를 모시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어린아이를 입양해 환관으로 키워 대를 이었다. 양부와 양자의 성은 다른 경우가 많았다. 가령 명종 때의 상약(약을 담당하는 환관) 노익겸의 양부는 환관 박한종이었다(‘조선왕조실록', 명종 14년(1559) 9월 25일자 기사). 부자간의 성은 다르더라도 정은 두터웠다. 


행여 아비(환관)가 죄를 짓고 귀양을 가면, 양아들(환관)은 아비를 위해 상소를 올렸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8년(1523), 9월 5일자 기사 참조). 아버지를 모욕하는 조정 관리가 있으면, 아들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격렬히 항의했다. 1663년(현종 4)에는 이상익이라는 조정 관리가 어린 환관들 앞에서 환관 최대립을 비판하자, 이를 목격한 환관 양달원이 거세게 항의한 일이 있었다. 조정은 양달원의 무례를 문제 삼았다. 그런데 양달원은 최대립의 양자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비방하는 이상익의 언동을 좌시하기 어려웠다.(조선왕조실록, 현종 4년 7월 11일자 기사) 


따지고 보면 환관 최대립에게 큰 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시부에 소속된 노비에 관한 공무로 환관들이 경상감사 이상진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상진은 별로 협조하지 않았다. 최대립은 환관을 대표해 이상진을 약간 비판했을 뿐이다(조선왕조실록, 현종 4년 6월 15일 기사)

타성받이로 이어진 조선의 환관 가문

정조 때 환관 이윤목이 편찬한 ‘양세계보’.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정조 때 환관 이윤목은 환관들의 통합 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를 편찬했다. 그의 7대손 환관 문건호 등이 100년 뒤에 이를 다시 개정했다. 이 족보에는 15세기 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생존한 환관 650명이 수록돼 있다. 거기에는 양자녀의 출생지와 본적도 포함돼 있다. 

환관들이 집안의 화합과 번영을 위해 족보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일이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환관 가문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환관도 족보를 중시했다. 그들도 조상의 제사와 자손들의 친목을 사회적 의무로 여겼다. 한국은 가장 성리학적인 나라였다. 


환관의 재산 상속은 어땠을까. 일찍이 1437년(세종 19)에 그 문제에 관해 조정은 원칙을 정리했다. 환관이 생전에 직접 사들인 노비는 양자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일가친척에게서 받은 노비는 친가의 조카와 종손 등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그 밖의 재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환관도 족보를 가진 나라였으므로 양자를 통해 제사도 이어가고, 재산도 물려주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승려들도 사제 간에 가문과 재산을 주고받았다. 가문의 계승을 이처럼 중시한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백승종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