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10.10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06년 2월 14일, 임영진 관장이 이끄는 전남대박물관 조사단은 전남 고흥 길두리에서 시굴 조사를 시작했다.
임 관장은 오래전부터 길두리 안동고분(雁洞古墳)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분구(墳丘) 정상에 드러난 덮개돌로 보아 전남 지역 다른 석실분과는 구조가 다를 것이라 추정했다.
금동관, 길두리 안동고분, 전남대박물관.
직경 36m, 높이 3m에 달하는 분구의 정상부를
정리하니 도굴로 교란된 것 이외에도 2개의
덮개돌이 더 있었다.
그것을 제거하자 동서로 길쭉하게 배치된
석곽이 드러났다.
동쪽이 넓고 서쪽이 좁은 형태였고 흙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널길을 갖춘 석실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내부에 대한 본격 조사에 앞서 도굴 구덩이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부슬부슬한 흙이 채워진
도굴 구덩이가 바닥을 향해 계속 이어지자
'혹시나?' 했던 일말의 기대마저 여지없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런데 1.2m가량 하강한
지점에서 교란된 흙이 사라지고 조금 단단한
흙이 나타났다.
조사원들은 잔뜩 긴장한 채 노출을 계속했다.
도굴 구덩이가 끝난 곳 조금 아래에서
짙은 갈색으로 변한 흙이 보였다.
철기에 녹이 나면서 철기를 감싸고 있던
흙 색깔마저 바뀐 것이다.
곧 조사원들은 연이어 탄성을 터트렸다.
동벽 아래에서 갑옷과 투구, 중앙에서
청동거울과 칼, 서벽 쪽에선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백제 양식 금동관이었다.
백제 왕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흥반도에서 당대 최고급 물품이 출토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라움은 컸다.
게다가 다른 금동관과 달리 망자의 머리에 씌워준 것이 아니라 상자에 담아 부장한 점이 특이했다.
3월 25일 임 관장이 '5세기 초 고흥반도 일대에 대규모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라며 발굴 현장을 공개하자
학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임 관장의 주장을 수용하는 연구가 많았지만 그와 달리 고흥반도가 근초고왕 대 이래
백제의 지방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해석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무덤 주인공을 왜에서 망명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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