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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어느 오후 강의실에서

바람아님 2018. 11. 28. 08:38


중앙일보 2018.11.27. 00:20


공기업 감사들에 특강 기회
고임금 부문의 양보와 함께
'주52시간 예외'두자고 하자
적의와 냉소 시선 쏠리더니
필자 이전 칼럼에 불만까지
정책훈수의 씁쓸한 현실 느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11월 중순 어느 날 오후, 서울대 강의실에 헐레벌떡 들어섰다. 아침 일찍 포항발 KTX에 몸을 싣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정년을 이태 앞둔 동료 교수의 호출을 외면할 수는 없던 터였다. 중년의 늙은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들 책상에 놓인 명패가 얼핏 읽혔다. ‘한국남부…감사’ ‘한국토지…감사’ ‘한국정보…감사’. 오십 줄에 들어선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중년의 향학열이 존경스러웠다. 그게 실수였다.


강의는 현 정권의 고용정책, 방향은 옳지만 방법이 잘못됐음을 점검하는 내용이었다. 소득과 고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음은 세상이 다 아는 터, ‘정부실패’가 쓰나미처럼 덮친 이유를 세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뻥 차기 축구. 목표 지점을 설정한 뒤 모든 선수가 그리로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둘째, 운동권 방식. ‘최저임금제’와 ‘주 52시간제’ 의도는 좋으나 부문별 차등 없이 획일적 실행을 강제했다. 셋째, 노조환상. 노조는 항상 정의롭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정책유연성을 잃었다.


중년 학생들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그럼 그렇지. 의기양양해진 교수는 다음 단계로 진입했다. “노동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런데 “임금 주는 사람도 아름답다”. 학생들이 약간 동요하기 시작했다. “현 정권의 최고 목표인 고용창출을 이루자면 (고임금 부문의) 임금 양보가 필수적이다!”에서 드디어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한 학생에게 발언권을 줬다. “소득불평등 시대에 임금 양보라니요, 시대착오적 발상입니다.” 시대착오? 교수가 답했다. “인건비 올리고 고용 늘리라니, 그것도 단기간에? 경제학원론에도 그런 이론은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냉소가 빚어 나왔다. 아차, ‘고임금 부문’을 생략했던 거다. 그래도 교수는 마지노선을 쳤다. “현재 방식은 자본저항을 촉발하고 경제여력을 훼손합니다. 고용과 소득추락은 불 보듯 뻔하지요. 정권을 잃게 됩니다.” 그러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학생이 장바닥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원하시던 대로 장하성 실장이 경질됐네요. 그럼 대찬 교수께서 정책을 맡아 끝까지 밀고 나가세요. 경제와 정권을 절벽에 떨어뜨려 보시죠!”


웬 시비? 그 학생에게 다가서 말했다. “여기는 대학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좋지만 예의를 지키세요. 교수에게 말투가 거칠군요.” 항의와 비아냥이 가득 찬 실내가 잠시 숙연해졌다. 침묵을 지키던 늙은 학생이 소리쳤다. “끝까지 들어봅시다!” 그래 좋다, 교수는 스웨덴의 ‘연대임금정책’으로 나아갔다. 냉소가 비수처럼 번득였다. 이거 뭐지? 결론을 내려야 했다.

송호근칼럼
첫째, 대기업과 협력사 간 불평등 거래를 먼저 척결하지 않고 영세업주와 자영업자에게 짐을 전가했다. 둘째, 54조원에 달하는 고용지원금을 피고용인에게 직접 지불했다면 소득과 고용이 모두 개선됐을 것. 셋째, ‘주 52시간제’ 예외 영역을 두라는 것, 예컨대 R&D 부문과 시간제 노동자. 넷째, 생산 스케줄이 계절에 영향을 받는 영세 부문은 적어도 6개월 탄력근로제를 허용하라는 것. 그래도 냉소는 걷히지 않았다.


교수를 바라보는 눈빛에 적의(敵意)가 서렸다. 더 말해 무엇 하나, 강의를 끝내야 했다. 안경과 옷을 챙기는 교수에게 뒷좌석에 앉았던 학생이 시위하듯 소리쳤다. “교수님, 왜 박근혜 패션에 그리 관심이 많으셨나요? 말해 보세욧!” 이쯤 되면 반란이다. 반란이 아니라 인민재판이다. 2013년 1월, 박근혜 당선자가 사파리를 입을 때를 조심하라는 글이었다. 투쟁모드니까. 그러고서 기자와 국민에게 ‘닥치시고’(shut up!)를 연발하는 ‘벙커인수위’는 문제라고 썼다. 소통의 환풍구가 닫힌다(2013년 1월 ‘박근혜와 패션’). 결국 불통정권은 그렇게 몰락했다.


강의실을 나오면서 교수가 되받았다. “수백 편 칼럼 중에 유독 그게 걸렸습니까? 귀하는 행간의 의미를 못 읽는군요.” 환성과 비난이 강의실을 나오는 교수의 뒤통수를 때렸다.

씁쓸했다. 정권이 성공해야 나라의 근심이 잦아든다. 좌파든, 우파든 생계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서민의 한결같은 희망이다. 대학은 훈수 두는 곳, 어떤 정권이라도 정부실패를 감시해야 한다. 정책 수정을 점검한 강의가 소리쳐 항변할 만큼 재수 없었을까? 늙은 중년 학생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뭔가 안쓰러웠는지 안면이 있는 듯한 중년 학생이 따라 나왔다.


교수가 물었다. “왜 이렇게 거칠지요?” 그러자 중년 학생이 힐난하듯 말했다. “낙하산이지요!” 아! 낙하산. 공기업 감사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인사하는 중년 학생의 모습이 닫혔다. 교수를 실은 엘리베이터는 끝 모를 바닥을 향해 낙하했다. 재수 없는 날이었지만 남북협상 공적에 가려진 현실감을 회복한 날이기도 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