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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지진과 사회적 여진

바람아님 2018. 11. 14. 08:00
[중앙일보] 2018.11.13 00:31>

진도 5.4 포항 지진 발생한 지 1년
공적 사적 관심, 북새통 구호활동이
이재민 삶에 사회적 충격 던져
지진은 수많은 ‘버려진 존재’ 양산
재산파괴라는 끔찍한 재앙은 물론
‘사회적 죽음’도 선고할 수 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땅이 흔들린다.” 십 년 전, 춘천시 외곽 면사무소 직원이 불쑥 던진 말에 필자는 깜짝 놀랐다. 지진?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땅을 팔아 부락민의 토지 소유가 흔들린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남동부 철강도시 포항은 정말 땅이 흔들렸다. 정확히 1년 전 2017년 11월 15일 오후 2시30분, 리히터 규모 5.4 본진이 발생했다. 진앙지 부근에 위치한 흥해읍 아파트 수 개 동이 심한 충격에 뒤틀렸고, 마을 복지관과 개인 주택들이 파손됐다. 시설 피해가 2만7000여 건, 부상 92명, 이재민 1797명이 발생했다.
 
포항 생활 석 달째, 가장 빈도가 높은 얘기 주제는 단연 지진이었다. 어느 오후 한담 중 굉음이 잠시 났을 뿐인데 동료의 얼굴엔 긴장감이 돌았다. 군용기가 저공 비행하는 소리였다. 지진 때도 그랬다고 했다. 사이렌 소리가 났고, 건물을 잇는 다리가 출렁거렸고, 자동차가 진동을 했다. 고층 아파트 주민의 기억엔 죽음의 공포가 묻어났다. “좌우로 30㎝ 정도 흔들렸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지요.” ‘땅이 꺼진다’는 절망적 수사(修辭)가 현실 체험으로 엄습할 때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와 대면한다. 어떤 이는 꺼질 듯 내려앉는 방바닥에 엎드려 죽음을 체험했다. 불과 4초였지만 말이다.
 
진도 5.4 지진에 웬 엄살인가? 대규모 쓰나미가 수십 개 마을을 삼킨 동일본 대지진, 수천 명 사망자를 낸 인도네시아 지진에 비하면 불과 4초 동안 기둥과 장롱과 부엌을 흔들었을 뿐인데. 아니다. 바닥이 출렁이는 진도 5.0 이상의 지진이 가하는 심리적 충격은 강도가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하다. 불현듯 닥치는 죽음의 공포가 그것이다. 4초 후 죽음은 불현듯 물러갔지만 공포심은 몸에 각인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신적 피해’를 호소한 포항 시민이 거의 80%,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이 필요한 사람이 40%에 육박하겠는가? 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이 실시한 조사 결과다.
 
송호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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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부 해안 도시에서 발생한 지진은 잊혔다. 지진의 사회적 여파는 포항시 경계를 넘지 못했다. 본진 이후 닥쳐온 100회 이상의 여진(餘震)도 규모가 작아 포항 외곽을 맴돌다 소멸했다. 지진은 국가의 대사가 아니었다. 국민적 관심 대상도 아니었다. 땅 밑이 뜨거워 지각이 꿈틀대는 것까지를 책임질 수는 없다 해도 재난 수습을 끝내 지방정부로 전가하는 이른바 ‘재난의 지역화’ 행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진도 5.0 이상의 지진이 인구 밀집 지역을 느닷없이 타격할지 모를 일이고, 친척 집으로 흩어진 수백 명과 흥해체육관에서 지금도 새우잠을 자는 이재민의 불행이 우리의 현실로 닥칠지 모른다.
 
조선시대에도 대우뇌전(大雨雷電)과 경천동지(驚天動地)는 국가 대사였다. 숙종 때(1717년) 대구 인근 양산단층에 지진이 발생하자 왕은 축문을 내려 해괴제(解怪祭)를 지내라 일렀다. 대구부사와 경주현감이 관권을 가동해도 적자인민의 구제는 우선 군주와 중앙정부의 책무였다. 이재민에게 긍휼미를 베풀고 세금을 면제했다. 특별재난지역을 선포한 중앙정부가 물러간 후, 주택 파손 5만5000건 중 전파(全破) 671건, 반파(半破) 285건은 피해보상을 받았다. 기울어진 D아파트는 폐쇄됐다.
 
소파(小破) 판정을 받은 흥해 H아파트 주민은 영락없는 난민이다. 재난지원금 200만원과 함께 ‘수리해 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물이 줄줄 새고, 곳곳에 금이 간 집에 들어갈 수 없다. 대안 없는 주민들이 더러 귀가해 어두운 방에 불을 켜도 H아파트는 이미 흉물이 되었다. 정치인과 언론과 구호단체가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렸는데, 행정원칙을 고수하는 시정과 현실을 읍소하는 피해주민 간 판정시비는 지금껏 진행형이다.
 
100회 여진은 별것 아니었다. 그러나 해당 관청들의 분주한 업무분장, 구호시민단체, 언론과 방송의 일관성 없는 개입, 익명 봉사자들의 출몰은 죽음의 공포보다 더 쓰라린 절망감을 안겼다. 엇갈린 수습, 충돌하는 방책들의 와류에서 지진이 강타한 사생활과 인생을 건져 낼 수 없음을 알았다. 포스텍 연구팀(김준홍·김원규 교수)은 그것을 ‘사회적 여진’으로 개념화했다. 본진 이후에 몰려든 공적, 사적 관심과 북새통 구호활동은 이재민의 삶을 오히려 어지럽히는 사회적 충격이었을지 모른다. 체육관 텐트에서 입동 추위를 걱정하는 이재민이 말한다. “우리는 버려진 존재예요.” 이들은 지진으로 시민권을 잃었다.
 
진도 5.4 지진에도 수많은 ‘버려진 존재’가 양산되는 한국에 진도 6.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한다면 어찌 될까. 세월호가 국가안전체계의 맹점을 드러냈듯, 포항 지진은 선량 시민에게 재산파괴라는 끔찍한 재앙은 물론 비정한 ‘사회적 죽음’을 선고할 수 있음을 알려줬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