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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의 서양고전산책] 저승의 영웅 만나니 "차라리 살아 있는 하인이 좋아"

바람아님 2019. 1. 31. 08:45

(조선일보 2019.01.31김헌 서울대 인문연구원 교수)


플라톤 이전 古代 그리스인에게 저승은 그림자의 세계였을 뿐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도 죽음보다 삶을 소중하게 여겨
가난·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삶을 선물로 여기는 날 오기를


김헌 서울대 인문연구원 교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오디세우스가 던진 답이 있다.

그는 지혜와 모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바다 건너 트로이아에 도착하여 10년 동안 전쟁을 치렀는데,

트로이아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그의 반짝이는 지혜가 짜낸 '목마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생은 전쟁이 끝난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만 다시 10년이 걸렸다.

그 지난(至難)한 모험의 과정에서 귀향의 비법을 알아내려고 망자(亡者)들의 세계인 하데스까지 내려가야 했다.


전쟁과 모험으로 너덜너덜해진 그는 그곳에서 뜻밖에도 먼저 세상을 떠난 전우들의 혼백을 만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아킬레우스의 혼백(魂魄)이었다. 살아서도 빛나고 돋보였던 최고의 전사(戰士) 아킬레우스,

사람들은 그를 신(神)처럼 우러러보았었는데, 죽은 뒤에도 그의 위세는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저 사람 참 복 받은 사람이네, 죽었지만 여한이 없겠다' 싶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그게 아니라고 반박한다.

생기가 빠진 희멀건 망자들 사이에서 왕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시골에서, 그것도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을 팔더라도

살아만 있다면 좋겠다고 한다. 괜히 위로한답시고 죽음에 대해 그럴싸하게 말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왕의 모습이라지만 허깨비에 불과한 아킬레우스, 그의 앞에 선 오디세우스는 폭풍과 모험에 찌들어 심히 남루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킬레우스의 부러움을 산 것이다.


옛 그리스인들에게 저승은 어두운 지하에 있는 그림자의 세계였지, 기독교에서처럼 빛나는 천상의 왕국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몸을 가지고 숨을 쉬며 살아가는 지상이 전부였다. 내 몸에서 혼백(psychē)이 빠져나가 하데스로 가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우리 속담 그대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생각이다.


[김헌의 서양고전산책] 저승의 영웅 만나니
/일러스트=이철원
 
이런 인간관을 결정적으로 뒤집은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를 그려주면서 죽음을 아주 근사한 것으로 설명했다.

죽음이란 영혼이 감옥 같은 몸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자유로운 영혼은 천상의 그곳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인간들에게는 빛나는 이데아의 세계 같은 것은 없었다.

죽음은 곧 존재에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내가 죽더라도 자손이 대대로

혈통을 이어나가게 하는 것이 삶의 최선이었다. 게다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내 이름을 길이길이 남길 수만 있다면

최고의 인생을 산 것이었다.


저승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오디세우스는 알키노오스 왕의 궁전을 방문한다.

쪽배에 몸을 싣고 항해하다가 거센 폭풍에 난파되어 죽을 뻔한 직후였다. 오디세우스는 따뜻한 환영의 잔치에 참석하면서

죽은 아킬레우스의 한탄과 일맥상통하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왕이시여, 이렇게 잔치를 벌이고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함께 먹고 마시며 떠들며,

신과 같은 목소리를 가진 가인(歌人)의 노래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낯선 이방인조차 적대감이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그곳에서 오디세우스는 삶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죽을 것만 같이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아침에 깨어나 아직 살아 있음을 발견하며 안도하곤 했다.

또 하루가 값진 선물로 주어졌음이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기뻤다.

날마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 이 선물을 소중하게 쓰겠노라고 다짐했다.

살아 있음에 대한 오디세우스의 예찬(禮讚)에 깊이 공감한 것이다.


그러나 하루를 시작하면서, 그것을 선물이라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징벌이라 느끼며 무거운 삶을 아프게 살아내는 수많은 사람들을 매일매일 발견한다.

그들은 가난과 차별과 폭행, 질병과 전쟁에 시달리면서 죽음이 삶보다 낫겠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 앞에서 오디세우스의 예찬은 무색해지며, 매일 아침 나의 개인적인 다짐은 초라해진다.

나로 인해 내 곁의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내 곁의 사람들로 인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이 아침에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