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9.08.08. 03:02
한일갈등 해소 요구를 반역으로 몰아
국제정치는 우리 힘으로 못 바꿔도 국내정치는 성숙한 국민이 바꿔내야
하지만 일본이 혐한(嫌韓) 감정을 자극해 지난달 참의원선거에 이어 평화헌법 9조 개정에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 마이니치신문은 “눈앞의 이익을 얻고 장기적인 국익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사설까지 썼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연일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를 비난하며 대책 마련에 열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미 집권당 싱크탱크는 반일(反日)감정이 내년 총선에 이롭다고 천기누설을 해버린 뒤다.
정치 감각이 발달한 양정철 민주연구소장은 황급히 사과했지만 집권세력은 반일감정 선동을 멈추지 않을 모양이다. 애국과 매국, 의병과 죽창을 거론한 조국 전 대통령민정수석 등을 언급하며 “왜 이 정부는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을 존중하지 않느냐”는 6일 야당 의원의 질의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주권,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까지 우리가 포용하고 갈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대통령 측근쯤 되면 의례적인 말이라도 “이제 정부를 믿고 국민은 감정을 가라앉혔으면 좋겠다” 정도로 말해주길 바랐다. 정부 입장 또는 대법원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외교적 해법을 강조한 국민을 대한민국의 독립과 주권, 헌법 부정으로 본다는 청와대 시각은 섬뜩하다.
강제징용 피해자 재판에 2006년까지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했던 문 대통령으로선 대법원 판결이 정의(正義)일 것이다. 판결 직후 이낙연 국무총리가 전문가들과의 간담회에서 도출한 한국기업+일본기업+한국정부의 2+1 공동보상 해법도 청와대는 거부했다고 한다. 민주화운동 출신 일각에선 박정희 대통령 때의 한일협정 체결 역시 잘못이라며 ‘1965년 체제 극복’까지 밀어붙일 기세다.
한일협정은 ‘한미일 정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고,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5·16 쿠데타 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이라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기록해 놨다. ‘운동권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파기해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의 고리를 끊을 경우 불평등한 한일관계 극복은 물론 한미동맹도 흔들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충격은 남북 경제협력으로 달래면서 남북연합이든 낮은 단계의 연방이든 성사되면 북이 오매불망하는 반제(反帝)민족해방혁명도 완성이다. “남북경협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되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5일 문 대통령 발언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은 “도덕적 우위를 바탕으로 성숙한 민주주의 위에… 경제강국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것”이라고도 말했다. 미안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도덕성 수준은 인사청문회를 통해 전 국민이 알게 됐다. 불법적 식민 지배를 당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에 도덕적 우위가 있대도 도덕성 같은 연성권력으론 군사적, 경제적 우위 국가를 압도할 수 없는 것이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인류 역사상 식민지 종주국이 식민 지배에 대한 피해를 배상한 전례는 없다. 그런 국제법도 안타깝지만 없다. 독일은 거듭 사과하고 있다지만 엄밀히 보면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과이지,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배상하진 않았다. 구한말 정치세력은 국익과 국제 정세를 외면한 채 이념과 정권다툼에 골몰해 나라를 잃었다. 정부가 과거사 청산을 원한다면 이런 폐습부터 청산해야 한다.
천운이라면 우리 국민이 양국 위정자의 정치적 의도를 알 만큼 알게 됐다는 점이다. “국제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국내정치와 달리 국제정치는 우리 힘만으로 변경할 수 없고 한국이 다른 데로 이사 갈 수도 없다는 것”이라고 안병준 연세대 명예교수는 강조했다. 일본은 어쩔 수 없어도 국내정치는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선 희망적이다.
다행히 여권 일부에서 일본 국민과 아베 정부의 잘못된 정치인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자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숙한 국민이 정치적 목적으로 반일감정에 기름을 붓는 한국의 잘못된 정치인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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