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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70년 전 北에 납치됐던 스승의 딸을 만났다

바람아님 2020. 2. 9. 09:25
조선일보 2020.02.08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 일기]

지난 1월 18일, 영락교회에 ROTC 기독 장로교 모임의 강사로 초청받아 갔을 때였다. 80대 전후로 보이는 부부가 찾아왔다. 부인이 "제가 김철훈 목사 딸입니다" 하면서 옆자리에 앉아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아버지를 만난 듯이 감격에 넘쳐 있었다. 나는 궁금했던 목사님의 얘기를 들었고 김 목사와 그 사모님에 관한 책도 기념으로 받아왔다.

김철훈 목사는 내가 중학교 때 고향(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 교회에서 나를 신앙적으로 키워준 분이다.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거부한 죄목으로 몇 달 동안 일본 경찰의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한 애국자였다. 고당 조만식 장로와는 각별한 숭실학교 선후배 관계로 섬기고 있었다. 해방 후에는 고당이 밀사 격으로 서울로 보내 '이승만을 도우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으나, 다시 북한으로 돌아와 목회자로 일하면서 반공운동에 앞장섰다. 북한 정권에 예속되어 있는 기독교연맹을 최후까지 반대한 대표적인 반공주의자로 공인받는 교계의 중견 지도자였다.

일러스트= 김영석
일러스트= 김영석
1948년 6월 28일에 이런 일이 있었다. 김 목사와 같은 평양 산정현 교회 유계준 장로가 주변 사람들에게 "목사의 신변이 위험하니까 절대로 혼자 외출하지 말라"고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김 목사는 혼자 약속된 장례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 후에 소식이 끊어졌다.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이 이상한 예감이 들어 모두 수소문했으나 길 위에서 사라진 후에는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것이 44세인 김 목사의 생애 마지막이 되었다. 공산당의 음모에 희생당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북한은 우리와 같은 삼권 분립 정치 구조가 아니다. 당 간부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 초헌법적인 권력을 대신한다.

그 사건이 발생하기 10개월쯤 전에는 내가 교장으로 있던 중학교의 이사장 김현석 장로가 비슷한 경로로 세상을 떠났다. 김 장로는 조만식의 절친한 동지였고 조선민주당 재정 관계에 협조하고 있었다. 평양시에서 6㎞ 정도 떨어진 고향 송산리로 숨어 들어와 팔순 노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탈북할 계획을 갖추고 있었다. 모친에게 큰절을 드리고 "당분간 뵈옵지 못하더라도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하고 나오다가 잠복해 있던 보안서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에는 여러 방법으로 수소문했으나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김 이사장이 잡혀가기 두 달쯤 전에 나에게 "공산당의 탄압은 절차나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없이 북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한 적이 있었다.

북한의 인권과 핵문제는 유엔(UN)을 비롯한 세계의 최대 관심사로 아직 남아 있다. 동포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유와 인간애가 보장되는 사회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 정부가 인권 문제를 외면하면서 남북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면 세계 무대에서 소외당하며 역사적 죄악을 범하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