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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파고다]8-①그림자 人生도, 손 쥐어보면 다 36.5도더라고요

바람아님 2014. 2. 16. 20:25
 빅시리즈⑧임 파출소장과의 순찰길에 만난 사람 풍경

술마시다 싸움나서
흘리는 피는 안 무서워도
"벌금 문다" 그 소리에 떤다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주상돈 기자, 김보경 기자]파고다공원 주변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 할아버지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파고다공원 일대를 매일 세 차례씩 순찰하는 인근 파출소장과 동행해 봤습니다. 낙원동 다문화거리, 공원 주변, 돈의동 쪽방촌, 인사동으로 이어진 순찰코스를 함께 걸으며 파고다공원과 이 일대의 '사람 풍경' 속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또 공원 근처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아저씨의 시선에 비친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전할까 합니다.
 
"옷 벗으면 다 똑같은 사람이야. 벗겨 놓으면 똑같은 인간이라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노숙자가 주변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는 임용환 소장(52)의 뒤통수에 대고 울먹이며 소리친다. 그 말이 임 소장에겐 비수처럼 꽂힌다. "하긴 은퇴해서 제복 벗고 파고다공원에 앉아 있으면 여기 오는 할아버지나 나나 똑같겠죠."

늘상 있는 사건이지만 그날 상황은 이랬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동문 앞. 노숙자 셋이 작정하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주변엔 막걸리와 소주병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그 자리에 순찰을 돌던 임 소장이 나타난 것이다. 노숙자들이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반항하지만 임 소장의 스마트폰 카메라가 더 빨랐다. "노상에서 술 먹으면 경범죄에 해당합니다." 임 소장의 경고를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손을 뻗어 소주병을 집으려는 무리들.

임 소장은 "음주소란 등은 경범죄 3조25항에 걸려 5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고 재차 경고한다. '범죄'라는 단어에 무감하게 굴던 이들이 '벌금'이라는 말에 일순간 멈칫한다. "일어나세요. 얼른." 임 소장이 재촉하자 그제야 "갈게 가. 옮기라고 하면 옮겨야지 뭐…"라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까만 비닐 봉지에 먹다 남은 과자, 소주병, 구겨진 종이컵을 쓸어 담는다. 이렇게 주변 정리를 마친 임 소장이 돌아서자 한 노숙자가 뒤통수에 대고 그렇게 내지른 것이다.

지난 2월4일 서울 종로2가 파출소로 부임한 임용환 소장은 경력 24년차 경찰이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지구대에서 근무할 당시에도 주취자, 노숙자 등을 단속했다. 이곳으로 옮겨와서도 임 소장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수시로 파고다공원 일대를 순찰한다. 스마트폰을 꼭 챙기는 이유는 순찰을 돌면서 수집한 주취자 등 100여명에 이르는 요주의 인물의 사진,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 신상기록을 보관ㆍ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재범자는 솎아내고 초범은 관리 대상에 올린다. 단속을 나갔다가 "○○○씨"라고 이름을 부르면 상대방이 화들짝 놀랄 때가 많단다. "이름을 부르면 내 정보가 경찰에 노출돼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게 임 소장의 설명이다.

이날처럼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임 소장은 '무관용의 원칙'을 고수한다. '깨진 유리창 법칙'을 믿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건물 관리가 소홀하다는 인상을 주는 탓에 그 일대가 범죄의 온상이 된다는 것이다. 미국 뉴욕시는 1994년 이 이론을 도입해 경범죄, 윤락 등을 집중 단속함으로써 2년 만에 우범지대였던 할렘지역의 범죄율을 40%로 뚝 떨어뜨렸다. 이렇게 깐깐하게 순찰을 돌기 시작하면서 실제 하루 대여섯 건에 이르던 이 일대의 폭행사건이 한두 건으로 줄었다고 한다. 임 소장은 "요즘엔 금요일에나 서너 건의 폭행사건 신고가 들어올까 말까 한다"고 했다.

임 소장과 함께 서문을 향해 걷고 있는데 저쪽에서 마른 체형에 검은색 패딩 점퍼를 입은 남성이 알은체를 한다. 이모(58)씨다. 마주서자 마자 임 소장 손을 덥석 잡고 악수를 청한다. 그는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술에 절어 살던 노숙자였다. 폭력을 휘둘러 종로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아들시키가 주유소를 하다가 부도나는 바람에 돈 회수도 안 되고 내 속상해서 그리 지냈다 아입니꺼. 지금은 술 잘 안 먹습니더. 오늘도 15일 만에 술 먹는거라예." 수줍게 웃는 그 모습에서 '주폭'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일대를 깨알같이 훑고 다니는 임 소장은 파고다공원 주변의 보도블록 개선이 시급하다고 했다. 실제 기자가 임 소장과 함께 파고다공원 정문인 삼일문에서 서문까지 한 바퀴를 빙 돌아본 결과 보도블록 군데군데가 움푹 파여 있었다. 보도블록 연석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게 훼손됐거나 곳곳이 깨져 있었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임 소장은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들이 걷다가 넘어져 다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만취한 노숙자가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보낸 적도 있었단다.

낙원상가 바로 앞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박모씨도 누구보다 노인을 가깝게 지켜보는 사람이다.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시급 6000원을 받고 하루 3시간씩 파고다공원 주차장을 관리한다. 박씨가 볼 때 파고다공원은 '디자인 서울'의 구호와는 한참 동떨어진 공간이다. 무료급식을 먹기 위해 오전 11시부터 땅바닥에 철퍽 주저앉거나 신문지를 깔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고 한다. 박씨는 "디자인 서울이다 뭐다 전시행정에 돈 쓰지 말고 노인이 앉아있을 수 있는 등받이 의자나 가져다 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지정문화재(사적 354호)인 파고다공원은 내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서 무턱대고 의자를 갖다 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보행자 통로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란다.

박씨는 젊은 시절 건설회사에서 일하며 외화벌이에 나섰던 산업역군이었다. 자녀들을 다 키우고 용돈이나 벌 심산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박씨는 "여기 오는 사람들 다 6ㆍ25전쟁 겪고 새마을운동이다 산업화다 뭐다 젊은 시절에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야. 누가 뭐래도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사는 데는 저기 앉아있는 분들의 공이 커. 나라에서 나몰라라 하면 안 되지"라고 했다. 그는 또 "저기 앉아서 신문 보는 노인들은 (공장에서) 조립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이런 분들 무조건 밥 얻어먹게 만들지 말고 '나도 일해서 밥 사먹는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국가 시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낙원전집에서 일하는 한 할머니(69)는 말한다. "파고다공원 오는 노인들 지금이야 어디가서 대우 못 받지만 소싯적엔 잘나갔던 사람도 많아. 그런데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다 같은 처지지." 그래서일까. 여기 오는 할아버지들은 '젊었을 때 뭐했슈'라고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무용담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파고다공원을 돌아다니는 동안 "거 언론사 기자요? 나도 젊었을 때 KBS랑 연합통신서 20년 근무했어요. ○○방송국 ○○○가 내 후밴데…"라고 말하는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임 파출소장에게 "나도 경찰생활 15년 했어. 1970년대에 사건에 휘말려서 어쩔 수 없이 옷 벗었지. 총경까지 하슈"라고 말을 건네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곳 파고다공원에서 마주친 할아버지들의 눈에선 회한은 있을지언정 욕심은 없어 보였다. 제복과 명함을 반납하고 공원을 찾는 할아버지들은 그저 '노인'만은 아닐텐데 '옷 벗으면 다 똑같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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