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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의 패악에도, 국민은 민주정부 수립에 표를 던졌다

바람아님 2024. 3. 30. 05:23

조선일보 2024. 3. 30. 03:02

[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첫발 1948년 5·10 총선거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했다. UN 총회는 ‘UN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고 1948년 1월 호주, 캐나다, 중국 등 8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이하 UN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소련군 사령관은 UN위원단의 방북을 거부했고, UN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5·10 총선거는 국민이 직접 대표를 뽑아 헌법 제정 등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보통·평등·비밀·직접 4대 원칙에 입각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선거였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소련·북한의 반대, 대내적으로는 좌익 세력의 조직적‧폭력적 저항에 직면해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UN위원단 입국 이후 ‘단선‧단정(單選單政: 단독 선거‧단독 정부) 반대 투쟁’에 나선 남로당은 2월 7일부터 총파업 투쟁(2‧7 총파업)에 돌입했다.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 획책하는 UN위원단 반대한다!”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 반대한다!”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분단에 반대한다’는 남로당의 투쟁 명분은 한 꺼풀만 벗기면 소련과 북한 중심의 한반도 전역 공산화와 다름없었다.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김달삼 등 350여 명은 한라산 정상과 주요 고지에 봉화(烽火)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제주도 내 경찰지서 24곳 중 12곳, 우익 인사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번에도 폭력 투쟁의 명분은 단선·단정 반대, 통일 조국 수립 그리고 완전한 민족의 해방이었다.좌익의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총선거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열기는 뜨거웠다.

1948년 5월 10일 화창한 봄날, 한국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5·10 총선거 이후에도 남로당은 관권을 동원한 총체적 부정선거였다고 선동했다. 하지만 5월 12일 오후 윤곽이 드러난 개표 결과 당선자 198명 중 무소속 당선자가 전체의 42.9%에 이르는 85명이었다....등록 유권자의 최종 투표율은 95.5%였다. 


https://v.daum.net/v/20240330030244560
좌익의 패악에도, 국민은 민주정부 수립에 표를 던졌다

 

좌익의 패악에도, 국민은 민주정부 수립에 표를 던졌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했다. UN 총회는 ‘UN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고 1948년 1월 호주, 캐나다, 중국 등 8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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