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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국로(國老)를 찾지 않는 사회

바람아님 2014. 10. 2. 11:49

[출처 ; 한국일보 2014-9-29일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천고사설삽화

호(皓)는 희다, 깨끗하다는 뜻과 함께 노인이란 뜻도 있다. 동양사회에서 지혜로운 네 노인의 집단지성을 가리키는 말이 상산사호(商山四皓)인데, 사호(四皓)라고도 한다. 진(秦)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 네 노인은 상산(商山)으로 들어갔다.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었기에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불렸던 네 노인은 영지버섯 등을 따먹으며 지냈다. 유방(劉邦)이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項羽)를 꺾고 천하를 통일했을 무렵에는 이미 천하에 현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래서 한(漢) 고조 유방이 사호를 불렀으나 네 노인은 ‘자지가(紫芝歌)’를 부르며 거절했다. 자줏빛 버섯(紫芝)이란 선가(仙家)에서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치던 영지버섯을 뜻한다.

 

한 고조 유방은 여후(呂后)의 아들 유영(劉盈)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척부인(戚夫人)을 총애하게 되자 척부인의 소생인 유여(劉如)로 갈아치우려고 마음먹었다. 여후, 즉 여태후가 나중에 척부인의 손발을 잘라 인체(사람 돼지)로 만들었던 비극의 단초가 이 태자 교체 기도에 있었다. 다급해진 여후는 유방의 모사(謀士) 장량(張良)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장량의 계책은 뜻밖에도 사호를 극진한 예로 불러서 태자의 곁에 두라는 것이었다. 태자가 공손한 서찰을 써서 올리자 세상으로 나온 사호는 태자를 보좌했다. 이 모습을 본 유방은 척부인을 불러 “내가 태자를 바꾸려고 했으나 저 네 노인이 태자를 보좌해서 이미 우익(羽翼)이 되었으니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라고 태자 교체를 포기했다.

 

사기(史記) ‘류후세가(留侯世家)’의 주석인 ‘사기색은(索隱)’은 진류지(陳留志)를 인용해서 “동원공의 성은 유(庾)씨인데, 정원 안(園中)에 거주해서 이를 호로 삼았으며, 하황공은 성이 최(崔)씨이고, 제(齊)나라 사람인데 하리(夏里)에 은거하며 도를 닦았으므로 하황공(夏黃公)이라고 불렀다…”고 네 사람의 출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산인권주(山人勸酒)’에서 “푸르고 푸른 높은 소나무, 가지 축축 늘어진 아름다운 늙은이들… 갑자기 일어나 태자를 보좌했네, 한왕이 이에 다시 놀라서, 척부인을 돌아보고, 저 노인들이 우익을 이루었구나 라고 말했네(蒼蒼雲松, 落落綺皓…?起佐太子, 漢王乃復驚, 顧謂戚夫人, 彼翁羽翼成)”라고 이 고사를 시로 읊었다. 장량은 한 고조 유방을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주었는데, 자신이 해결사로 나선 것이 아니라 네 노인의 지혜를 활용하자는 것이었으니 역시 명 참모였다. 걸언돈사(乞言敦史)라는 말이 있다. 유교 사회에서 이상으로 삼는 하ㆍ은ㆍ주(夏殷周)의 삼왕(三王) 때는 노인을 모시고 양로연(養老燕)을 베풀었는데, 이때 노인들에게 좋은 말(善言)을 들려달라고 요청해서 돈사(敦史)로 삼았다는 것이다. 돈사란 두터운 덕을 기록한 역사서를 뜻한다.

 

조선의 국로(國老)는 황희(黃喜ㆍ1363~1452년)였다. 흔히 ‘황희 정승’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문종실록 황희 졸기는 “재상으로 24년 간 있으면서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말했다(문종실록 2년 2월 8일)”고 말하고 있다. 24년을 재상으로 있었으니 ‘직업이 정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벼슬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관대한 성품이었지만 원칙적인 일에서는 양보하지 않아서 여러 번 수난을 겪었다. 가장 큰 수난은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했을 때였고, 이 때문에 사형 위기까지 몰렸다. 남원으로 귀양 갔던 그는 상왕 태종의 천거로 세종 때 다시 조정에 복귀하는데,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황희를 중용했다. 황희는 여러 번 영의정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세종은 들어주지 않았고, 무려 여든여섯이 되는 세종 31년(1449년)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그것도 완전히 놓아준 것도 아니고 하연(河演)을 영의정부사로 삼으면서 황희의 영의정 자리도 그대로 놓아두고 2품의 봉록을 주었다. 말하자면 ‘자문 영의정’이었다.

 

그런 황희가 문종 2년(1452년) 세상을 떠났는데, 문종실록은 졸기에서 “조정과 민간이 놀라서 탄식하여 서로 조문(弔問)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서(吏胥ㆍ아전)와 여러 관사(官司)의 복례(僕隷ㆍ노비)들도 모두 전(奠)을 베풀어 제사를 지냈으니, 전고(前古)에 없던 일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전과 노비들까지 영의정의 죽음에 전을 베풀어 스스로 제사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황희의 인품에 감복하고 그의 관대한 성품에 덕을 본 아랫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조선 초기가 성대했던 것은 이처럼 국로를 높일 줄 알았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지금은 어떤가? 특정인의 집권을 돕는 늙은이들의 모임 따위는 있어도 진정한 국로는 찾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쓴 소리를 하는 진정한 국로는 여야 어디에서도 찾지 않는다. 권력욕에 마비된 젊은 현역들에게 국로의 충언은 귀찮을 뿐이고, 국정 표류는 남의 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