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윤평중 칼럼] 대한민국, 中國 앞에 더 당당해야

바람아님 2014. 11. 28. 10:18

(출처-조선일보 2014.11.28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경제, 외교·안보 國益 크다 해도 서해 불법 조업, 韓·中 FTA 관련
정부·여론 및 進步 측 무반응은 不平等 용인한 小國 의식 결과
사드 추진과 해양 주권 수호는 양국 상호 존중에도 필요하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사진1593년 4월의 일이었다.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대 지휘관 이여송은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을 잡아 와 

곤장 40대를 때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여송이 바로 명령을 취소해 끌려가던 유성룡이 풀려나지 

않았더라면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 

이때 유성룡은 도체찰사(都體察使)였다. 

영의정과 같은 정1품의, 군정과 민정을 책임진 전시(戰時) 최고 사령관이었다. 

중국의 파견군 지휘관이 조선 최고위직 인사를 이렇게 대하는 상황에서 명나라 군대의 횡포는 

왜군의 만행 못지않았다. 평소 이여송이 유성룡의 경륜과 담대함을 어려워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비대칭적 한·중(韓中) 관계의 그림자를 생생히 압축한 징비록(懲毖錄)의 한 장면이다.

문제는 기울어진 한·중 관계가 과거 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제 서해 5도 주민들은 중국 어선의 싹쓸이 불법 조업을 우리 정부가 막아달라며 대대적인 해상 시위에 나섰다. 

중국 배가 우리 바다의 물고기 씨를 말리는 수준을 넘어 한국 어민의 어구를 탈취해 생존권까지 위협하는 터에 

대한민국의 해양 주권은 어디 갔느냐는 울부짖음이다. 

우리 공권력의 정당한 법 집행에 극한적 폭력 저항을 불사하는 중국 어선의 행태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국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대중(對中) 교역에서 우리가 얻는 경제적 이득이 워낙 크고 이제 막 한·중 FTA를 체결한 데다 

북한 문제의 유일한 중재자인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계산이다. 

나라를 책임진 박근혜 정부의 고심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경제와 외교·안보 차원의 국익 극대화라는 국가 전략의 수사(修辭)로 치장된 대중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을 피해 가긴 어렵다. 

박근혜 정부가 정말 냉정한 국가 전략을 갖고 있다면 정권 출범 이후 한국 경제와 외교·안보에 총체적 악영향을 끼칠 정도로 

악화일로인 대일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한국 정부의 미지근한 대응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여론과 시민사회의 반응이다. 

서해의 중국 어선 불법 조업에서는 심각한 인명 사고가 터져야 우리 사회가 반짝 일회성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한번 화를 내고는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서해 문제는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지도 않는다. 

만약 일본 어선이나 미국 배가 우리 바다에서 불법 조업을 일삼으면서 대한민국의 공권력을 

중국 어선처럼 공공연히 능멸한다면 미·일 두 나라에 대해 한국 민심이 지금같이 잠잠할지 의문이다.

더 기이한 것은 중국과 얽힌 현안에서 진보 진영과 시민 단체가 보이는 온정적 태도다. 

극렬하게 한·미 FTA를 반대하던 시민 단체들은 한·중 FTA에 대해선 형식적인 몇 마디 말에 그쳤다. 

물론 한·중 FTA는 한·미 FTA에 비해 낮은 수준이며 시의적절한 협정이다. 

그래도 한·중 FTA로 사회적 약자인 농어민이 큰 피해를 보고 수출 위주 대기업이 최대 수혜자일 게 분명하다. 

한국 진보가 평소 대기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사회적 약자의 보호자를 자처했음을 감안하면 한·중 FTA에 대한 

한국 진보의 침묵은 괴이하기까지 하다. 

중국 어선의 서해 불법 조업에 대해 진보 단체가 중국에 항의했다는 소식도 없다.

대중 관계에서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 공통의 잠재의식은 소국의식(小國意識)이다. 

물론 이는 중국과 한반도의 2000년 교섭사(交涉史)를 관통한 불평등한 힘 관계를 반영한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중국에 조공해 생존을 담보하던 작은 나라가 아니다. 

경제적 성취에다 중국이 따라오기 힘든 민주화까지 이룬 세계에 드문 중강국(中强國)이다. 

조선시대에조차 유성룡은 당당하고 의연했다. 

왜군과 싸우기는커녕 타협해 한반도 분할로 전쟁을 끝내려 했던 명나라와 이여송에게 이로정연(理路整然)하게 맞섰다. 

그럼으로써 나라를 보전하고 명나라 조야(朝野)의 존경까지 받았다. 

오만방자했던 명나라 제독 진린이 리더로서 실력과 인품을 증명한 충무공 이순신에게 감복(感服)한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조선 왕조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성공과 번영의 기반 위에 서 있다. 

자유를 누리는 성숙한 시민들과 비전을 지닌 민주적 리더십의 존재가 그 핵심이다. 

대한민국은 중국 앞에 더 당당해질 자격이 있다. 

북한 문제를 지금처럼 악화시킨 데 대해 중국에 쓴소리를 해야 하며, 

북한 핵미사일에 대응할 사드 배치를 국가 전략에 의거해 의젓하게 추진하면 된다. 

북핵이 우리에게는 생사의 문제임을 의연하게 설득해나가야 한다. 

독도처럼 서해에서도 우리의 해양 주권을 지켜야 마땅하다.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존재를 남이 존중할 리 만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