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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는 왜 루브르 소장품이 되었을까?

바람아님 2015. 2. 12. 11:07
[J플러스] 입력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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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1506, 나무판위에 유채, 77×53cm, 루브르미술관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그 존재만큼은 알고 있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인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건축, 조각, 해부학, 천문학, 무기제작, 자연사, 음악 등 분야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그야말로 르네상스맨(Renaissance man)의 전형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가 남긴 20여점의 완성작 중 <최후의 만찬>과 함께 순위를 다투는 명작이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금자탑<모나리자>는 어떤 이유로 프랑스의 보물이 되어 루브르에 남게 되었을까.  

 

<모나리자>가 그려지기 까지


 

피렌체 부근 토스카나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밀라노와 프랑스에서 보내게 된다. 밀라노에서 그를 후원한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를 위해 궁정화가로 일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루도비코가 죽자, 1500424일 밀라노에서의 18년 생활을 청산하고 피렌체로 돌아온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고, 이미 밀라노에서 <암굴의 성모><최후의 만찬>으로 그의 명성과 경력은 최고조를 구가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산타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제단화를 그리기로 하고 그곳 수도원에 정착한다. 그의 걸작 <모나리자>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모나리자>라는 이름과 그 대단한 명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모나리자>의 모델은 누구이며 왜 레오나르도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예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뛰어난 화가조각가건축가의 생애(미술가 열전)에 따르면 1503년부터 1506년까지 4년 동안 고심하면서 모나리자를 그렸으나 마치지 못했다는 일화와,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부인인 모나리자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모나는 마돈나의 약칭으로 부인이라는 뜻이므로 모나리자는 곧 리자 부인을 말한다). 모나리자의 실제모델이 레오나르도 자신이었다는 설과, 리자가 아닌 제3의 여성이라는 의견도 제시되었지만, 리자외에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할 만 한 근거는 더욱 없으므로 현재는 리자부인일 확률이 가장 높다. 이로써 우리는 <모나리자>의 모델이 누구이며 언제 그려진 것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왜 <모나리자>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상화라는 것은 교황이나, 추기경, 또는 왕가나 권력을 가진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력한 주장으로는 귀족가문이었던 리자의 아버지 안톤마리아와 공증인이었던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피에로가 직업상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거처했던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에 실크를 납품했던 리자 남편 프란체스코가 이 과정에서 레오나르도를 알게 되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리자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가 주문자의 지위보다는 내면을 중시했다는 점과, 당시 신흥상인 즉 브루주아 계급이 중요세력으로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소비자로 등장하는 사회적 변화를 인지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레오나르도가 주문을 수락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모나리자> 이야기


 

<모나리자>의 모델인 리자는 피렌체의 한 부유한 상인의 부인일 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모나리자>는 동시대 작품들에 비해 대단히 다른 놀라운 점을 지니며 여러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기본을 정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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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도 디 푸치오 피사노, <지네브라 데스테의 초상>, 15세기경, 유화, 43×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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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의 두폭화>, 1472, 유화, 33×47cm

 

16세기까지의 초상화는 인물의 뚜렷한 윤곽선, 형식적인 배경처리, 얼굴의 라인을 가장 잘 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던 측면 프로필구성으로 대부분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는 그 어느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

먼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리자의 모습은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스푸마토(sfumato)기법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세상에 나오기 전 15세기 이탈리아의 여러 거장들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다소 딱딱하고 실제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어딘가 모를 어색함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화가의 지식이나 묘사를 위한 인내가 부족해서 라기보다는 인물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더 자세히 모사하면 할수록 결과적으로는 현실적인 생동감은 더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레오나르도는 인물의 세부묘사나 윤곽선을 세밀하고 뚜렷하게 표현하는 대신 형태와 형태가 서로 뒤섞이며 경계가 흐려지듯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로 표현하여 무미건조하고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모나리자>의 입과 눈에서 표현된 스푸마토기법으로 인해 그림 속 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는 리자가 어떤 기분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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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얼굴부분, 1503~1506년, 나무판위에 유채, 77×53cm, 루브르미술관 

 

처음 그림을 보면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눈과 입자락의 끝의 경계표현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마치 녹아들 듯 흐리게 표현했기 때문인데, 표정이 변하는 찰나의 순간을 그려낸 듯 생동감 있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배경은 섬세하고 유려한 자연풍경으로 처리하였는데 의도적으로 왼쪽과 오른쪽의 지평선을 어긋나게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의 위치에 따라 모나리자의 얼굴도 변하는 것처럼 보여 지게 하기위한 레오나르도의 의도이다.

모나리자의 머리 뒤에 소실점을 둔 원근법의 사용과 당시 유행한 딱딱한 측면 초상을 자연스럽고 편안한 3/4포즈의 콘트라포스토 자세도 바꾼 것 또한 이후 라파엘로 등 다른 거장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눈썹이 없기 때문에 미완성 일까?


 

<모나리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배경처리에서 스케치 정도만으로 마무리된 미완성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우선 눈썹이 없다는 확연한 점에서 <모나리자>는 미완성 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미술가 열전에서 바사리가 모나리자를 묘사한 부분에서 리자의 눈썹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갖가지 추측이 제기되었다. <모나리자>가 그려지던 시대에는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실제로 눈썹을 뽑아버리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애초에 눈썹이 없었다는 설, 원래는 눈썹이 있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약으로 여러 겹 특수처리 하였는데, 가장 바깥에 그려진 눈썹이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으로 인해 사라지거나 떨어져 나갔다는 설, 그리고 잦은 복원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후에 바사리가 리자에 눈썹에 대해 남긴 기록은 바사리가 실제로 <모나리자>를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류라고 판단되었지만, <모나리자>의 눈썹은 지워진 것인지, 아니면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어떠한 이유에서 일부러 그려지지 않은 것 인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아낼 방법은 없다. 눈썹이 없는<모나리자>에게 익숙한 우리로서는 만약 <모나리자>가 눈썹이 있었다면 지금과 어떻게 다른 얼굴일지, 신비로운 미소는 어떻게 달라질지 그저 상상해 볼 따름이다.


 

<모나리자>가 프랑스 루브르에 걸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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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모나리자 전시실 내부

 피렌체에서 머물던 레오나르도는 1513년 피렌체가 프랑스에 점령되자 로마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휘아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 뿐만 아니라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당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끄는 최고의 거장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당시 예순을 넘긴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훨씬 젊은 동료들과의 세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노년으로 접어든 자신의 충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패기만만한 젊은 천재들을 바라보는 레오나르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아이디어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비해 점점 노쇠해지는 자신의 육체를 한탄하지 않았을까. 그즈음 마침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1세가 레오나르도에게 손을 내민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프랑수와1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레오나르도의 재능과 솜씨에 감복해 있어서 만약 그가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온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한다. 뭔가 계기가 필요했던 레오나르도는 조수 두 명과 하인한명을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향한다. 이때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몇 가지 챙겨서 가져갔는데, 그중에 바로 <모나리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생의 끝자락에 이국땅에서 새 삶을 시작한 레오나르도를 프랑수와 왕은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된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간지 4년 만에 프랑수와1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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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임종을 바라보는 프랑수아 1세>, 1818년, 유화, 40×50.5cm

레오나르도는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태어난 피렌체나 24년간의 후원을 받은 밀라노가 아닌 프랑스 땅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 프링수아 1세는 퐁텐블로성에 미술관을 꾸미고 <모나리자>를 포함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것은 후에 퐁텐블로 파가 생겨나게 함으로써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시작하게 한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 후 프랑수아1세는 <모나리자>를 파리로 가져가고, 루이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져다 놓았으며, 그 후엔 나폴레옹의 개인소장품이었다가, 전시품 중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루브르의 심장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그곳에 전시되고 있다. (1911년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징과도 같은 <모나리자>가 프랑스에 있는 것에 분개한 한 이탈리아 노동자가 대낮에 <모나리자>를 훔쳐 고국으로 가져갔다가, 2년 만에 다시 루브르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라파엘로부터 19세기화가 카미유 코로등 화가들은 끊임없이 모나리자를 모방하고 그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반대로 이러한 <모나리자>의 열풍을 조롱하는 작품들도 제작됐는데 오히려 원작의 명성만 더 높아지게 했다. 마르셀 뒤샹의 수염난 모나리자>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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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수염난 모나리자>, 1919, 유화, 조르주 퐁피두센터

 

그림이 그려진지 5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모나리자>에 대해 얘기하며, <모나리자>의 원작을 보기위해 예술적 순례를 떠난다. <모나리자>의 시작은 피렌체의 한 여성의 초상에 불과했지만, 그 후 많은 예술가들의 모방을 통해 재생산되고 유명한 것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글로벌리즘 현상과 매스미디어에 의해 그 불멸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