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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영화 & 역사] 유럽의 '公敵' 말살에 나선 서유럽 '천덕꾸러기'

바람아님 2019. 8. 22. 07:22

(조선일보 2019.08.22 남정욱 작가)


'쉰들러 리스트'


남정욱 작가남정욱 작가


고대에서 중세까지 게르만족은 서유럽의 천덕꾸러기였다. 기후와 토양 때문에 추위와 굶주림은

일상이었고 잘게 쪼개진 채 주변 나라들의 용병으로 팔려 다니던 게 그 민족의 숙명이었다.

훈족의 기마병이 밀고 들어왔을 때는 로마 영토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며 로마 황제의 자비를 구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아내와 딸들은 로마 관리들에게 몸을 팔았다.

인질로 내주었던 아이들은 십 년 후 돌아와 몸 곳곳 매질로 생긴 상처를 보여주며 아비들을 울렸다.

그렇게 서러운 세월을 보낸 게르만족이 통일을 이루자 또 다른 약자인 유대인을 모질게 괴롭혔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짓궂다. 게르만족이 천덕꾸러기였다면 유대인은 유럽 전체의 공적(公敵)이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원죄는 기본이다.

성서에서 금하는 고리대금업(금융)을 떠맡긴 뒤 시킬 때는 언제고 나중에는 돈만 밝힌다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세상의 모든 나쁜 일은 다 유대인 때문이었다. 전염병이 돌아도 유대인, 전쟁이 나도 유대인, 심지어 우리 집 애가 아파도

옆집 사는 유대인 탓이었다. 적당한 핑계만 있으면 언제든 죽여도 되는 민족, 그게 유대인이었고 그 적당한 핑계조차 없이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이 나치 독일이다.

핑계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반(反)유대주의의 화신이었던 히틀러는 생물학적으로 탁월한 발상을 한다.

유대인을 인간에서 벌레나 세균으로, 종(種)적 이동을 시켜 버린 것이다. 그는 미래 세대에게 이런 유산(유대인)을

물려줄 수는 없다며 대중을 선동했다. 학살 대상이 성인에서 아동과 여성으로 확대되었던 것은 이런 논리가 대중에게

먹혔기 때문이다. 벌레라는데, 세균이라는데. 1933년 나치 독일의 출범과 동시에 최초의 강제수용소가 세워질 때

반대는 없었다. 강제수용소 하면 떠오르는 게 아우슈비츠다. 1940년에 만들어진 아우슈비츠가 절멸(絶滅) 수용소의

대명사가 된 것은 그나마 생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기 90만명과 60만명을 '처리'한 트레블링카, 베우제츠가

이름만 남은 것은 말 그대로 절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증언자가 아예 나오지 않은 까닭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처음부터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매우 인도주의적인 발상이었다.

처형장을 방문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에게 장군 하나가 불만을 터트렸다.

"이렇게 매번 총으로 사람을 쏘면 우리 애들 심성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이토록 아름다운 부하 사랑을 나는 듣지 못했다. 숲에 모아놓고 폭탄 터트리기, 자동차 배기관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 이용하기 등 각종 방법이 다 동원된다. 이때 등장한 탁월한 인물이 루돌프 회스다(발음이 비슷해서 히틀러의

4대 천왕 중 하나인 루돌프 헤스와 헛갈리기 쉽다). 그는 수용자들의 옷을 소독할 때 쓰는 살충제 치클론 B에 주목했다.

용기에 담겨 있던 가루가 밖으로 나오면서 가스로 변하는 이 약품으로 나치 독일은 대량 학살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성공적인 실험을 마친 그날 밤 회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부하들에게 총살을 지시할 때마다 내내 찜찜했는데 이제야 마음의 평안을 찾았도다.'


나치 독일만 유대인 절멸에 몰두했던 것이 아니다.

협조 공문을 받자 기다렸다는 듯 유럽 여러 나라가 만행에 가담했다.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에서는 기차로 유대인을 실어 날랐다.

서유럽에서 최초로 유대인을 송출한 나라는 프랑스였다.자유와 인권의 나라 프랑스는 경찰이 직접 유대인을 색출했다.

살아 돌아온 유대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자기 집을 차지한 낯선 얼굴들은 그들을 범죄자 취급했다.

심지어 숨겨놓은 돈을 찾으러 온 것 아니냐며 반으로 나누자는 인간까지 있었다. 악마가 있으면 천사도 있기 마련이다.

나치 당원이기도 했던 한 독일 사업가는 가스실로 갈 유대인을 빼돌려 1200명의 목숨을 살렸다.

600만명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기껏 1200명이냐고 하지 마시라. 성경에도 나온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니.

3시간 20분짜리 뭉클한 감동 '쉰들러 리스트'의 압권은 쉰들러가 자기가 타고 다니던 차를 보면서 오열하는 장면이다.

"이 차를 팔았으면 열 명은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 대사가 주는 울림이 좋아 가끔 이 영화를 꺼내 본다.

혹시 살았을지 모르는 그 열 명, 기꺼이 쉰들러의 눈물을 닦아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