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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세상읽기] 볼크링겐 제철소의 悲劇은 남의 일이 아니다

바람아님 2015. 3. 10. 16:50

(출처-조선일보 2015.03.10 문갑식 선임기자)

포스코에 밀려 古鐵 전락한 과거 獨 산업혁명 상징처럼…
'新품종 개발, 과학자 연결' 포부로 출발한 KIST유럽硏
官 간섭·성과주의 쫓기다간 선진국 발판 헛된 꿈 될 수도


	문갑식 선임기자
문갑식 선임기자
자를란트(Saarland)는 독일 16개 연방 가운데 하나다. 
베를린·브레멘·함부르크 같은 3개 도시 주(州)를 제외하면 가장 작다. 
프랑스와 맞닿은 이곳의 주도(州都)는 자르브뤼켄으로 전체 면적이 2570㎢에 인구가 100만명 안팎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만큼 자를란트의 운명을 잘 표현하는 말도 없다. 
최근 200년간 주민 국적이 독일·프랑스로 바뀐 게 여덟 번이다. 
지금도 야산 하나 넘는데, 거리 하나 지나가는데 독불(獨佛) 국경이 정신 사납게 교차한다.

이 팔자(八字) 험한 땅에 운수 평탄치 못한 대한민국과 인연 깊은 곳이 두 군데나 된다. 
그 첫째가 1994년 산업 시설론 세계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볼크링겐 제철소다. 볼크링겐 제철소는 1873년 가동한 유럽 철강 산업의 중심이자 
독일 산업혁명의 상징이었다. 
북서부 탄광의 석탄으로 자를란트의 철광석을 녹여 만든 철강이 모젤 강과 자르 강을 타고 
수출될 때 독일의 국력은 아침에 뜨는 해와 같았다.

이 공장을 탐냈던 한국인이 두 명 있었다. 50여년 전 젊은 광부(鑛夫)들과 "후손에게 번영을 물려주자"고 다짐하다 울먹였던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죽자"는 각오로 '철강 입국'을 이룬 고 박태준 포철 회장이다.

그렇게 우리가 부러워했던 볼크링겐 제철소는 1986년 망했다. 
까마득한 후배 격인 포스코의 공세에 경쟁력을 잃고 자빠진 것이다. 
고철(古鐵) 덩어리로 변한 이 세계문화유산은 독일 입장에서는 우울한 패배의 앨범과 다름없다.

제철소가 자를란트의 '과거'라면 내년에 설립 20주년을 맞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럽연구소는 '현재'다. 
우리나라 국책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에 터를 잡은 이 연구소는 독일이 1990년대 중반 우리에게 사정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1964년 독일에 차관을 빌리러 가며 공짜 비행기까지 구걸했던 초라한 신세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실업난에 직면했던 자를란트 주정부가 내건 조건은 한 가지, '현지인 고용 창출'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자를란트 주립대학 안에 금싸라기 땅을 내주며 온갖 편의를 다 봐줬다.

처음엔 썰렁했던 KIST 유럽연구소 주변에는 지금 세계 굴지의 연구소가 15개나 입주해있다. 
건물 하나 건너편에 들어선 막스 플랑크 연구소만 두 군데나 된다. 
이것은 KIST 유럽연구소의 입지가 한눈에 봐도 유럽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반경 450㎞ 안에 독일 주요 도시에다 프랑스 파리, 스위스 취리히, 벨기에 브뤼셀이 있고 
조금 더 거리를 넓히면 영국 런던·옥스퍼드·케임브리지까지 품에 들어온다.

	[문갑식의 세상읽기] 볼크링겐 제철소의 悲劇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1966년 서울 홍릉(洪陵)에 건립된 KIST가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에 경제 발전의 지도를 그렸다면 
1996년 건립된 KIST 유럽연구소는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신품종(新品種)을 만들어내고 파종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자체 특허만 103건을 출원했고 현재 바이오·글로벌 환경 규제 대응 방안을 연구 중이다. 
삼성정밀화학 같은 대기업부터 중소기업의 EU 진출도 이곳을 통해 추진되고 있다. 
재(在)유럽 한인 과학자들을 한데 묶는 것도 KIST 유럽연구소다. 
문길주 전(前) KIST 원장은 "세계 최고인 EU를 뚫지 못하고 예전 수준에 만족하면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며 
"KIST 유럽연구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했다.

작년 12월 최귀원 박사를 새 소장으로 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KIST 의공학연구소를 단시일에 세계 수준으로 키운 인물이다. 
기계·전자·의학을 융합한 의공학연구소와 13개국 연구원이 포진한 KIST 유럽연구소는 비슷한 환경이다. 
최 소장은 "독일을 보면 볼수록 강한 중소기업을 키우는 게 국가 발전의 요소임을 깨닫게 된다"며 
"유럽의 성장 엔진인 독일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한 과정은 침체로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이렇게 소중한 연구소에서 '무한도전'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아이러니다. 
처음에는 '끝없이 도전한다'는 긍정적인 것인 줄 알았는데 "무조건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전화 드리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지금까지 KIST 유럽연구소는 19년간 7명째 소장을 맞았다. 바로 옆 독일 신소재연구소(INM)의 소장은 지금이 2대째다. 
어느 기관의 리더가 소신껏 청사진을 현실로 바꿀까, 굳이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본국에서 쥐꼬리만 한 지원으로 생색은 다 내면서 "성과를 밝히라"고 다그치는 것도 우물가에서 숭늉 찾기 식 냄비 근성이다. 
그럴 때마다 KIST 유럽연구소가 해온 항변이 "우리의 목적은 경기(景氣) 부양이 아니라 경제발전"이었다고 한다.

KIST 유럽연구소에 필요한 것은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대신 간섭을 없애는 것이다. 
유럽에서 독자 생존하도록 '본국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국회나 관(官)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타령이나 한다면 볼크링겐 제철소의 비극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