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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2 )

바람아님 2013. 3. 8. 23:31

 
 

 

제임스 티소(2 )

James Tissot

(1836~1902)  

 

 

 

그 직후(1871. 5)에 런던으로 도피했다.

 런던의 세인트존스우드에 살면서 다시 창작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림 외에도 에칭·드라이포인트·메조틴트 등의 동판화들을 많이 제작했다.

1870년대 후반에는 칠보 세공에도 관심을 보였다. 때때로 외국여행을 하기도 했지만,

1882년 11월 아일랜드 태생의 애인이 죽을 때까지 계속 런던에서 살았다.

 

파리로 돌아가 예전의 인기를 되찾으려고 한동안 노력했지만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1885년 신비한 신앙적 체험 이후 그리스도의 생애를 삽화로 그리기로 결심하고 여러 차례

성지를 순례했다.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350여 점의 수채화를 그려 2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구약성서〉의 내용을 묘사한 일련의 소묘들을 그리던 도중에 죽었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티소의 새로운 양식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고,

대기와 인물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재현해내는 화가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티소는 주로 교양 있고 유행에 민감한 부르주아 계층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그들은 그들의 의상이나 집 안의 인테리어 장식으로 자신을 과시하기를 좋아했다.

티소는 구성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앵그르에 영향을 받아,

알려진 것처럼 젊은 여인의 머리 뒤를 비추는 거울은

오늘날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앵그르의 <모아테시에 부인의 초상>

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화면에 불필요한 요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이미지를 창조했다.

 벽지의 장식으로부터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컵 안의 작은 보라색 꽃다발,

 탁자 위에 무심하게 쌓여있는 책들, 작은 새장,

여인이 몸에 걸친 옷과 같은 상세한 세부묘사는 여인의 삶과 여인의 성격에 대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준다.

그녀의 눈빛에는 근심과 고뇌가 묻어나고 있는데,

이로 인해 티소가 그린 초상화 속 여인들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과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 출신의 티소는 1871년 파리 코뮌에 연루되어 런던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런던에서 그는 초상화가로 부르주아 사회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당대의 가장 인기있는 화가가 되었다.

제임스 티소는 젊은시절 파리의 상류사회 여인들의 패셔너블한 의상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들을 많이 선보여 예술계의 모드mode(불어로 fashion)라는 별칭도 얻은

19~20세기의 신고전주의 화가 입니다. 그의 성공은 놀라웠고 1870년 발발한

프러시안 전쟁당시 공산당원으로 몰려 런던으로

그의 성공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그시대의 최신 매거진 베니티 페어(Vanity fair)에 많은

패션일러스트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세를 이루고 있던 인상파를 지지하는 무리들은 질투심과 같은

보이지 않는 흑심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혹독히 비난하죠.

그들에게 있어서 부유층에게 사랑받는 티소의 작품은 단지 시대의

유행을 따르는 질 낮은 사진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혹평이 의아할 뿐입니다.

그러나 상류사회의 부인들과 젠틀맨 들에게는 자신들의 우아한 삶을 우아하게

표현해서 고마운(그의 작품의 붓터치가 얼마나 고상스러우며, 지적인 유머가

넘쳐나는 것에는 전혀 관심없이....)그의 값어치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들이 주최하는

겔러리등에도 자주 걸어주는 인기 화가가 되었죠.


그들의 사교계에서 티소는 단연 유명인사가 되었고 많은 상류층 인사들과 친분도

두터웠으나.신기하게도 같은 예술가들과는 어울리는 경우가 잦지 안았다고 합니다.

 영국생활시절 운명처럼 만나게된 아리따운 이혼녀 Kathleen Newton에게 반해

둘은 연인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고 티소는 그녀를 모델로 세워 많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다수의 그림에 표현된 여인들은  케슬린이미지 라고 할수 있겠네요.
그러나 그녀의 자살과 팔레스타인 방문 이후 그는 예전의 그림스타일이 아닌

예수님의 수난과 성경의 이야기를 담는 종교적인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네요.

자세히 보면 그의 그림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가 생각하던 상황의 묘사도

들어 있지만결말이 궁금한 영화의 중간 장면처럼 상상력의 끈을 놓지 못하게끔 하는

무언가가 있는것 같아요.
번창에 번창을 거듭하던 19세기 파리에서는 어떤 것들이 부르조아들의 흥미를 자아냈을까?
눈을 떼지 못할만큼 화려한 드레스들은 단연 여심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고.. 아마도

타이타닉일지도 모르는 호화 유람선에서 오후를 즐기는 커플들은 진짜 행복할까..

돈자랑 하고싶어 너무 치장한 여인은 이쁘기 보단
한없이 바보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등등.. 화려하지만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옛 부르조아들의 유머속으로 들어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