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세상읽기] 길을 잃은 한국 경제

바람아님 2015. 3. 18. 10:16

[중앙일보] 입력 2015.03.18

[일러스트=김회룡]

김종수/논설위원

 

지도에 없는 길을 나서겠다던 최경환 경제팀이 길을 잃은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지도에 없던 새 길을 찾은 것도 아니고 길을 새로 내지도 못한 채 ‘불쌍한’ 한국 경제를 끌고 이리저리 황야를 방황하는 꼴이다. 경제가 살아난다는 기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이제는 경제를 살려 보겠다는 목표마저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다. 기진맥진한 한국 경제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관찰자들은 줄줄이 한국 경제의 성장률 전망치를 낮춰 잡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라면 당분간 한국 경제가 회생될 가망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판단에서다.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는 했지만 최경환 경제팀은 지도 밖으로 그리 멀리 가지도 못했다. 경기 부양을 위해 확장적 재정·금융수단을 총동원하겠다고 했으나 사실 재정지출을 획기적으로 늘리지도 못했고, 정책금융을 확 푼 것도 아니다. 세금이 안 걷히니 재정자금을 더 풀 여력도 없었고, 국책 금융기관을 동원한 금융 지원도 얼마나 했는지 집계조차 못할 정도다. 그동안 한 것이라곤 부동산 관련 규제 몇 가지를 풀고 한국은행을 윽박질러 기준금리를 세 차례 내린 것뿐이다. 그나마 부동산 거래가 조금 살아나는 듯하고, 경기가 더 이상 고꾸라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지도에 없는 길을 나선 성과라고 하기엔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사이 정부는 복지·증세 논쟁에 휘말려 우왕좌왕하더니 연말정산 파동이 벌어지자 화들짝 놀라 ‘지도에 없는’ 비과세·감면의 소급 적용이란 나쁜 선례만 남겼다. 경제정책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원칙을 지키기 어렵고, 원칙이 무너지니 신뢰마저 잃는 모양새다.

 요즘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또다시 지도에 없는 길을 나섰다. 여기저기 헤매도 길이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기업들더러 길을 찾으라고 등을 떠민 것이다. 최 부총리는 경제단체장들을 불러 임금 인상을 요청하고, 중소기업의 임금 인상 여력을 높여 주기 위해 납품단가도 올려 줄 것을 당부했다. 여기다 당·정·청은 최저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대기업들이 자체 종업원들의 임금도 올려 주고 하청기업들이 최저임금을 올릴 수 있도록 납품단가도 올리라는 얘기다. 내수 확대를 위해서는 가계 소비가 늘어야 하고, 소비를 늘리려면 가계가 쓸 돈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으니 일단 억지로라도 임금을 올려 소비를 촉진해 보자는 것이다. 이른바 ‘소득주도 성장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논리적으로 그 인과관계가 확실히 입증되지 않았거니와 과연 미국·일본의 처방이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내적 정합성(整合性)과 외적 적합성(適合性)이 모두 부실한 주장일 뿐이다.

 우선 이미 고임금을 받고 있는 대기업 종업원들의 임금을 생산성과 무관하게 올려 주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소수의 대기업 종사자에 대한 임금 인상이 소비 진작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최저임금의 인상도 반드시 소비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무리하게 최저임금을 올릴 경우 한계기업이 고용하는 저임 근로자의 일자리만 줄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만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감소 효과가 총소득을 늘리지 못할 경우 전체 소비지출 여력은 오히려 줄어들 공산이 크다. 최저임금 근로자를 고용하는 영세기업이 대기업과 거래하는 하청기업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납품단가 인상이 최저임금 인상 여력을 늘릴 것이란 주장도 너무 단순해 보인다. 더 근본적으로는 가계소득의 증대가 내수 활성화를 통한 성장의 결과이지 성장을 이끄는 기폭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흡사 마차를 말 앞에 매고 마차더러 말을 끌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리한 임금 인상은 중장기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오히려 고용 감소와 가계소득 감소를 불러올 뿐이다. 그저 대기업은 돈이 많을 것이니 그 돈을 가계에 나눠 주면 소비가 늘어날 것이란 단순논리로 경제가 살아날 것으로 기대한다면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다.

 지도에 없는 길을 나서는 것보다 잘못된 지도를 철석같이 믿는 게 더 위험할 수 있다. 지금 최경환 경제팀은 엉뚱한 지도를 들고 한국 경제를 사지(死地)로 이끌고 있는 게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사실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했지만 한국 경제를 살릴 회생의 길이 지도에 없는 것은 아니다. 성장잠재력을 높일 수 있도록 기업의 투자여건을 개선해 주고, 규제를 풀어 서비스업을 키우며, 노동개혁을 통해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처방은 이미 오래전에 나와 있다. 다만 이 정부가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규제개혁은 미진하고, 투자의욕은 떨어졌으며, 노동개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수도권 규제만 풀어도 2조~3조원 규모의 투자는 당장 늘릴 수 있다. 의료 서비스 규제만 풀어도 청년 일자리 1만 개 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다. 공연히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 헤맬 게 아니라 지도에 나와 있는 길만 뚝심 있게 갈 수만 있다면 한국 경제가 회생할 희망의 빛이 보일 것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