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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제외교' 얕보던 미국의 굴욕

바람아님 2015. 4. 5. 11:01
시사INLive 2015-4-4

미국이 중국의 경제외교를 얕보다가 외교적 굴욕을 톡톡히 당했다. 2년 전, 중국이 아시아 철도와 교통·도로·항만 등 인프라 시설의 투자를 위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미국은 기존 국제 금융 질서를 흔든다며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면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 우방에 AIIB 가입을 적극 만류했다.

하지만 미국의 집요한 반대와 압력에도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레일리아 등 우방국을 비롯한 30개국 이상이 AIIB 참여를 결정하면서 미국의 꼴이 우습게 됐다. 미국 재무부에서 국제경제 담당 차관보를 지낸 프레드 버그스텐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 소장은 '오바마 행정부가 우방의 불참을 이끌어내려다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중국을 제압하려 한다는 중국 내 목소리를 강화시켜준 꼴이다'라고 비판했다.

2013년 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인도네시아 순방길에 올라 AIIB 구상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이처럼 빠른 속도로 순항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중국은 고대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의 중계지점인 중국과 카자흐스탄 국경지대 소도시 호르고스를 중심으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경제권으로 묶고, 나아가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포괄하는 '신 실크로드'를 추진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400억 달러의 실크로드 기금을 마련하고 AIIB 설립에 공을 들여왔다. 시 주석이 AIIB 구상을 밝히고,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아시아를 상대로 한 치열한 로비 외교를 벌였으며, 마침내 지난해 10월 초기 설립자금 500억 달러 규모의 AIIB를 공식 출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가입 의사를 밝힌 나라만 해도 아시아 48개국 가운데 방글라데시와 베트남 등 26개국에 달한다. 미국의 눈치를 보며 초조해하던 유럽의 우방들도 3월 말 창립회원국 등록 마감을 열흘 앞두고 실리를 좇아 AIIB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 ⓒAP Photo : 2014년 10월24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AIIB 설립 양해각서 체결식이 열렸다(위). 시진핑 주석(가운데 손 든 이)은 AIIB를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0~2020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인프라 개선을 위해서는 매년 7000억 달러 이상이 필요한데, 아시아개발은행(ADB) 차원의 자금 지원은 매년 100억 달러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금 사정이 풍부한 AIIB가 가세할 경우 인프라 시설 개선작업은 활기를 띨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엄청난 건설 특수가 예상돼 이들 나라가 '우방'이라는 명분이 아닌 경제적 측면의 실익을 좇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막판까지도 우방의 불참을 잔뜩 기대하다 낭패를 봤다.

미국이 AIIB 설립에 반대한 데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우선 AIIB 출현이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나아가 국제통화기금 등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 질서를 뒤흔든다는 논리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전통적으로 지역 차원의 국제 금융기관 간에 협조적 관계를 유지해온 관례가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로버트 젤릭 전 세계은행 총재는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AIIB에 대한 우려가 과장돼 있다. 내가 아직 세계은행에 몸담고 있다면 AIIB를 파트너로 대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AP Photo : 오바마 행정부는 AIIB 설립을 안보 사안으로 간주해 국가안보회의가 관할하도록 했다.


미국이 제기하는 또 다른 반대 논리는 AIIB가 중국의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즉 21세기 아시아 경제 패권 자리를 노리는 중국이 AIIB를 자국의 대외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리라고 미국은 전망했다. 하지만 이런 논리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중국은 AIIB 등록을 망설이는 유럽국에 중국이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의 대주주인 미국처럼 핵심 사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미국은 AIIB가 기존 국제 금융기관과 달리 여신 대상국의 환경 기준이나 투명성을 심사하는 규정이 미흡하다는 점을 꼽으며 AIIB의 설립을 반대한다.

상황이 이렇다고 해도 미국은 AIIB에 참여한 우방국을 원망할 처지가 못 된다. 중국 주도의 AIIB 출현을 자초한 당사국이 다름 아닌 미국이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개발은행 등 국제 금융기관의 의사결정 구조가 최대 주주인 미국 위주로 돼 있어 중국 등 신흥 경제 대국들의 불만이 점증하던 차였다.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2010년 주요 20개국 정상회담에서 IMF 개혁안이 채택됐다. 핵심 내용은 IMF 기금을 기존 규모의 두 배인 7200억 달러로 늘리되, 그에 따라 출연금이 늘어날 중국·브라질·러시아·인도·남아공 등 이른바 '브릭스(BRICS)' 신흥 경제 5국에 더 많은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다.

IMF 개혁안 처리 지연 등이 미국의 자충수

유럽의 나라들은 개혁안을 통과시켰지만 문제는 미국이었다. 공화당이 지배하는 미국 의회가 개혁안 처리에 제동을 건 것이다. 잭 루 재무장관은 '미국이 온건하고 합리적인 형태의 IMF 개혁안을 채택하지 않은 데 따른 좌절감에서 신흥 경제국들이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고위 관리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의회가 IMF 개혁안 처리를 질질 끌면서 중국에 AIIB를 출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줬다'라고 분개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응도 한심하다는 지적이다. 유럽 우방국은 AIIB를 상업적 국익이라는 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본 반면, 미국은 이 문제를 21세기 아시아 경제패권 자리를 둘러싼 안보 측면에서 다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경우, 피에르 파도안 재무장관이 마테오 렌치 총리에게 건 전화 한 통으로 AIIB 가입을 결정했다. 반면 미국은 AIIB 설립을 안보 사안으로 간주하고 국무부나 재무부가 아닌 국가안보회의(NSC)가 관할했다. 경제적 이득을 좇아 움직인 유럽국과 달리, 미국은 국가안보회의가 끼어들면서 주무부처 간 메시지 혼선과 우유부단을 키워 화를 자초한 셈이다.

AIIB를 애써 외면하다 외교적 고립을 자초한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민간 외교 연구기관인 미국 외교협회(CFR)의 국제경제 전문가 엘리자베스 이코노미 박사는 지금이라도 미국이 AIIB에 가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미국이 가입할 경우, AIIB에 일정 지분을 가지면서 비판자이자 감시자 구실을 할 수 있다. 또 미국 기업들에게도 인프라 시설투자에 따른 참여 기회를 보장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이 체면을 구기고 AIIB 가입을 추진한다고 해도 공화당이 의회를 지배하고 있어서 걸림돌은 여전하다. 중국 주도의 AIIB에 미국 의회가 기금 출연을 동의해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궁여지책으로 자국이 주도하는 세계은행을 통해 AIIB와 협력 관계를 추진한다는 것 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다. 이를테면 투자 경험이 없는 AIIB가 상환 능력이 부족한 나라를 지원하거나, 환경·인권침해 논란이 있는 개발사업에 손을 대지 않도록 세계은행이 돕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 또한 표면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이 세계은행을 통한 협력을 모색하는 것과 관련해 '우방의 AIIB 가입에 따른 외교적 굴욕을 만회하고, AIIB 투자 대상국이 중국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는 등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다'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의 이런 뒷북 대응도 명분과 실리에서 모두 승리한 중국의 외교 앞에서 약효를 잃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은 '국제정치에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오로지 국익만 존재한다'라는 19세기 영국 재상 파머스턴의 명언을 곱씹어야 할 때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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