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태평로] 세계적 역사학자 187명이 한국에 보낸 苦言

바람아님 2015. 5. 12. 08:35

(출처-조선일보 2015.05.12 김태익 논설위원)


	김태익 논설위원

내로라하는 세계의 역사학자 187명이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꾸짖고 나선 것은 일단 속 시원하다. 
그들은 평생을 일본 연구에 바쳐온 석학(碩學)이자 지일파(知日派)다. 
교묘한 말로 일본의 국가 책임을 부정해온 아베 일본 총리로서는 난감할 것이다.

우리는 든든한 우군(友軍)을 얻은 듯 "거 봐라" 하고만 있을 수 있을까. 
그러기엔 그들의 성명서에 들어 있는 두 문장이 걸린다. 
역사학자들은 "위안부 문제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의 민족주의적 공격에 의해 너무도 왜곡돼 
정치인이나 언론인뿐 아니라 연구자들조차도 역사적 탐구의 기본 목적을 상실한 상태"라고 했다. 
또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피해 국가에서 민족주의적 목적 때문에 악용하는 일은 국제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피해 여성의 존엄을 더욱 모독하는 일"이라고 했다. 역사학자들은 성명서 초안을 놓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고 한다. 굳이 두 문장을 집어넣은 데는 깊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성명서가 발표된 후 우리나라의 어느 외교관은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성명에 '왜곡'과 '악용'이란 문구가 들어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학자들이) 한국 편을 든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서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었다." 
학문의 자유와 중립성을 추구하는 학자들에겐 모독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다. 
바로 이런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경고로 그들은 이 구절을 넣은 것인지 모른다.

지금 한·일 간에 일본 메이지 시대 산업 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가 쟁점이다. 
등재 후보 23개 시설 중 야하다 제철소 등 7곳이 2차 세계대전 중 조선인을 강제 징용해 군수품을 만든 전범(戰犯) 기업이라고 해서 국내에 등재 반대 여론이 거세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주 국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위원국들에 우리의 반대 입장을 피력하고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뭘 갖고 반대하겠다는 건지, 그렇게 해서 끝내 등재를 막을 수 있다는 건지 알 수 없다. 
독일 푈 클링겐 제철소도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1873년 세워진 이 제철소는 1차 대전 때 독일군 철모의 90%를 생산했고, 2차 대전 때는 해외 노동력을 착취해 가며 수류탄을 만든 전범 기업이었다. 윤 장관은 대중의 정서에 따라 막연히 "반대하겠다"고 할 게 아니라 정교한 논리와 사실을 토대로 
독일과 일본의 근대 산업 유산 등재가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지 짚어야 했다.

역사학자 187명은 민족주의적 '왜곡'과 '악용'이 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일 간 과거사 문제는 이제 우리끼리 목소리 높여 일본을 공격하고 자족(自足)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고 아카데미즘까지 가세했다. 
큰 틀에서 보고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는 논리를 쌓아가야 더 큰 국익을 놓치지 않는다.

대중은 민족주의적이기 쉽다. 그걸 부채질해서 이득을 보려는 일부 정치인과 활동가가 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한 세계 저명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제3자의 것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에 대한 그들의 고언(苦言)도 제3자의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여야 성숙한 자세다.